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이슬 Mar 14. 2024

공백기(期)에 여백기(氣) 모으는 중


   입동이 오는 순간 모든 나뭇잎이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지고 곧바로 앙상한 가지만 남는 것이 당연한 겨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추운 날 비바람과 강풍에도 미처 떨어지지 않은 마른 나뭇잎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은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는 결과에 입각한 생각으로 삼십 년의 한 계절 한 계절을 보내버렸다. 기후 위기로 사계절의 개념이 무색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자기색을 띈 계절들을 눈과 마음으로 담고 살지 못한 지난날의 내가 떠올랐다. 한 해가 끝날 때쯤 여느 사람과 같이 무의미하다는 듯 말을 뱉곤 했다. 1년이 왜 이렇게 빨리 흘러가냐는 둥, 한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다는 둥. 주변 둘러볼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는 증거의 말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산 고생의 말이 허무함만 남겼다. 그땐 알 수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했다.



   유방암으로 세 번의 전신 항암 치료[중]로 인해 육체적 상실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실은 병으로 인해 얻은 게 더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연들이 순간순간 진실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겨울나무들을 새삼스럽게 보면서 저마다 고유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어떤 나무에는 오롯 가지만 남겨져있는 반면에 어떤 나무는 마른 나뭇잎들이 다닥다닥 너무 많이 달려있었다. 내 눈에 들어온 나무는 마른 나뭇잎이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안배되어 한 그루의 나무를 포근하게 해주기도 했다. 잠시 가만 서서 그 나무를 바라보는 찰나 까치가 가지 위로 날아와 착지했다.



   나뭇잎이 많이 달려있다고 하여 결코 아름답지 않았고 가지만 남은 나무 또한 어딘가 아쉽기만 했다. 빈 종이에 단 몇 개의 선들로 여백의 미를 느끼게 하는 동양화처럼 곧게 뻗은 가지, 마른 나뭇잎 몇 장과 한 마리의 까치가 움츠러든 기색 없이 나무의 여백을 채우고 있었다. 그 광경에 빠져 여백의 기운을 물씬 느꼈다. 그 뒤로 그런 장면이 내 눈에 연출될 때마다 나의 여백은 무엇으로 장식하며 사는가 사유해 본다. 나는 지금 공백기에 있다. 시간의 요구로 속박될 때 느끼지 못했던 삶의 선물 같은 기간이다. 그 공백기(期)에서 여백기(氣)를 모은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인데 여기에는 성미 급한 행동을 버리는 것들이 전부였다.



1. 미루고 미룬 일정을 마쳤을 때 또는 정반대로 할 일을 미룰 때까지 미루었을 때

2. 친구에게 온 카카오톡을 당장 읽고 싶지만 궁금함을 참고 운동을 마친 뒤 읽기로 결심했을 때

3. 드라마 정주행 대신 책을 완독 하길 택했을 때

4. 오설록 티를 사는 대신 직접 배, 생강, 대추, 오미자를 넣고 몇 시간 끓여서 차로 마실 때

5. 건널 수도 있는 애매한 숫자로 깜빡이는 횡단보도 앞에서 뛰지 않고 다음 신호를 기다리자고 마음먹을 때

6. 일이 어그러진 날 스스로를 책망하기보다 ‘그럴 수도 있지.’하면서 나 자신에게 한없는 너그러움을 내어줄 때

7.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로 향하기 전 역 내 꽃집에서 꽃 한 송이를 살 때, 그 꽃 냄새를 맡을 때

8. 의도적으로 휴대폰을 두고 외출을 할 때

9. 남편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풀어 한 송이씩 줄기를 사선으로 자르며 화병에 꽃을 꽂는 시간을 가질 때

10. 로켓 배송 버튼에 손을 대지 않고 사야 할 재료들을 종이에 쓰고 마트에 가서 손수 장을 볼 때



   ‘여백의 미’란 용어는 전에도 흔하게 숱하게 들어왔으나 내게 닿지 않았다. 암기식 단어에 불과했다. 여백이란 단어가 닿은 이제 나는 여백의 미 대신 여백의 기(운), 줄여 여백기라 표현해 본다. 그리고 그 여백기를 모으고 모아 전신을 타고 흘러가다 보면 언젠가 언제 그랬냐는 듯 덜 아픈 몸이 되어 있을 거라 믿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