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녀의 꿈은 같지만 사실은 달라요
친정 엄마는 소복이가 한 말과 행동들 중에서 특히 각인된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나를 만날 때 들려준다. 한 일주일 전 즈음이었나. 엄마가 “웃긴 거 말해줄까?”라며 말했다. 듣지 않겠다는 자유의지란 없다. 듣는 이의 듣겠다거나 안 듣겠다거나 하는 자유의사는 자동 음소거되고 엄마는 그 웃긴 이야기에 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웃긴 거 말해줄까”는 엄마가 대화를 시작할 때 사용하는 관용구와 같은데 어김없이 그날도 그 말로 대화 물꼬를 텄다.
“(웃긴 거 말해줄까?) 소복이 꿈이 뭔지 아니? 소복이가 할머니 되는 게 꿈이랜다ㅎㅎ“ 엄마의 관용구가 웃기지 않은 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날은 소복이가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그 말을 뱉은 귀여운 입모양을 상상하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걘 왜 할머니가 꿈 이래? 진짜 웃기네ㅋㅋ”하면서 엄마의 관용구를 인정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소복이가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 집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기에 아직까지 잠은 안 자려고 하지만 대신 키즈 카페처럼 오면 놀기 바쁘다. 문득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소복이 육성으로 듣고 싶어 침대에서 뛰노는 소복이에게 물었다. “소복아. 너 꿈이 뭐야?” 소복이기 대답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할머니가 기억을 부추기듯 말했다. ”소복이, 너 저번에 그랬잖아. 할머니가 꿈이라고. “ 그제서 소복이는 “나 할머니가 꿈이야.”라고 했다. 왜냐고 묻자 “할머니가 좋으니까.” 이보다 더 명쾌한 답이 어디 있을까. 꿈에 이유가 없지. 좋으니까 꿈인 거지!
나는 소복이에게 훌륭한 꿈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되겠다는 그 꿈, 결코 쉽지 않은 꿈이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며 아이의 꿈을 높이 샀다. 실은 나도 너랑 꿈이 같다며 나도 할머니 되는 게 꿈이라고 덧붙였다. 할머니가 되겠다는 우리 모녀의 꿈이 같을 줄이야. 하지만 목표만 같다. 그 꿈을 불러일으킨 원천은 다르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나의 통계학적 수명은 그리 길진 않다. 4기 환자의 5년 생존율은 34%도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처연하게 들릴 수도 있고 어떻게든 그렇게 살아낼 거라는 자기 의지로써 생생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소복이는 ’생‘과 결부 짓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소복이는 그저 자상한 할머니가 좋은 거다. 아기상어도 무조건 할머니 상어가 제일 좋다고 챙기는 내 딸. 항상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좋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때 묻지 않은 깨끗한 꿈이다. 아이에게 엄마가 온 우주는 맞지만 엄마만이 온 우주가 되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할머니 보살핌에 의해 자란 소복이를 보고 느낀다. 소복이에게는 할머니가 우주다. 아마 언젠가 내가 데려오는 날이 있더라도 애착 대상을 잊지 않겠지. 한편 그런 표현 방식에 다소 섭섭했다가 할머니의 관심을 잘 받고 자라 마음이 놓여 편안했다가 복잡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우리 모녀의 꿈은 쌍방향도 될 수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분명한 시간차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 시간차는 세월로 표현되며 부모는 그 세월을 먼저 통과한 사람이다. 아이 커가는 과정을 볼 때마다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아쉬워하고 지켜보면서 부모가 먼저 할머니가 된다. 할머니가 된 부모가 백세가 되고 아이 나이가 칠십이 되어도 부모 눈엔 여전히 추억의 아이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딸과 할머니가 되겠다는 같은 꿈을 꾸면서 알았다. 부모와 자식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속절없는 세월 속에서 추억거리는 점점 적어질 거라는 것을. 그렇다면 살자. 지금을 살자. 아이를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