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옹알이]
왼손잡이 째비와 엄마의 회초리
나에게 '어른'은 공포의 이름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선생님까지. 그들은 늘 나를 교정해야 할 '오답'처럼 대했다.
왼손잡이인 나는 밥상머리에서부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고집이 세서 바꾸질 못한다"는 할아버지의 호통 소리에 밥알을 눈물로 적시며 삼켰다. 절에 가면 어른들은 나를 '째비'라 부르며 혀를 찼다. 왜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면 안 되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꿋꿋이 왼손을 고집했다.
그 저항의 결과일까. 나는 '왼손 편향주의자'가 되었다. 글씨 쓰는 일 말고는 모든 일을 왼손이 도맡는다. 오른손은 펜을 잡을 때 빼고는 늘 휴업 상태다. 사회에 나와 술을 따를 때도 왼손을 썼다가 상대가 잔을 거두는 걸 보며 당혹스러웠고, 학창 시절 배드민턴 채를 왼손으로 쥐었다가 체육 선생님으로부터 "째비네"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죄지은 적 없는 '왼손 장애자'가 되어 마음의 절름발이로 살았다.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폐쇄적인 세상에서 나의 다름은 늘 호통과 비난의 대상이었다.
가정 안에서도 어른은 버거웠다. 급하고 불같은 성격의 엄마와 내성적이고 느린 나는 늘 어긋났다. 오빠의 짓궂은 장난에 소리를 지르면 어김없이 엄마의 회초리가 날아왔다. 과자를 주머니에 넣으라는 오빠의 꼬드김에 넘어가 도둑질 아닌 도둑질을 했던 날, 나는 채찍질을 당하듯 혹독하게 매를 맞았다. 그 매에 대한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가슴 켜켜이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었다.
나는 엄마가 매를 든 후에 나를 안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엄마와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그때의 엄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지만, 흉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끔 유튜브에서 '회초리' 장면을 찾아보는 나의 습관은, 아마도 해소되지 못한 그날의 공포를 어떻게든 직면하려는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부모가 되면 절대로 때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흘리면 닦으면 되고, 옷이 젖으면 말리면 된다고, 실수를 안아주는 엄마가 되겠노라 결심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엄마의 행동을 닮아가는 내 모습을 볼 때면 지독한 자책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미안하다. 많이 때리고,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해서... 사랑한다, 내 딸아."
그 한마디에 가슴속 뜨거운 응어리가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20대 초반 방황하던 나에게, 10살 때 나를 괴롭혔던 사람을 향해 대신 욕을 해주며 "엄마가 지켜줄게"라고 말해주던 그 순간. 10년이 넘어 들려온 그 위로는 내 인생에 새로운 지지자를 만들어주었다.
이제 엄마는 내게 화내는 차가운 어른이 아니다. 평생 내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지지자다.
그런 엄마를, 이제야 나는 온 마음 다해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