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포르투의 교량
나는 교량을 좋아한다.
그래서 토목공학과에 진학했다.
2009년 10월, 인천대교가 개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로지 그 다리 하나를 보기 위해 인천에 갔다.
마침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해야 할 시기였고,
그날 본 인천대교는 내 결정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사실은 학점이 부족해 기계나 화공 같은 인기 전공은 갈 수 없었다.ㅎ)
토목을 공부할수록 교량이 더 좋아졌다.
교량은 토목공학의 정수다.
토목 기술이 발전할수록 교량 구조는 간결해지고,
선은 얇아진다.
벽처럼 거칠고 투박한 콘크리트 구조체는
어느새 한 줄 선으로 도시의 공기를 가른다.
상판과 기둥이 길고 가늘수록,
그 아찔한 긴장감이 더 아름답다.
요즘은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그런 교량을 자주 만난다. 볼 때마다 위치를 저장해 둔다.
포르투는 야경이 유명한 도시지만,
의외로 '교량 백화점’이다.
오랜 세월 도시를 지켜온 고풍스러운 교량부터,
구스타프 에펠이 설계한 철교,
그 에펠의 제자가 만든 랜드마크 교량,
그리고 최신 토목 기술로 지어진 매끈한 구조물까지.
이번 글은 포르투에서 내가 직접 본 그 다리들에 대한 기록이자,
좋아하는 것을 오래 들여다본 기록이다.
1. Ponte da Arrábida
https://maps.app.goo.gl/zuAVFBdCqA5reBZV9
포즈해변으로 가는 트램에서 본 교량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다음날 새벽에 조깅 겸 방문했다.
가는 길이 조금 험난하긴 했지만, 가보길 잘했다.
아라비아 다리는 도우루 강 위를 가로지르며 포르투와 빌라 노바 드 가이아를 연결하는 아치형 교량이다.
길이 493미터, 높이 70미터. 270미터에 달하는 아치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곡선이 안정감 있다.
마치 도시 전체를 껴안고 있는 팔 같다고 해야 할까.
이 다리를 설계한 사람은 포르투갈 엔지니어 에드가르 카르도주이다. 1957년에 착공해서 1963년에 완공됐다. 건설된 당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근콘크리트 아치교였다고 한다.
폭 8m의 아치형 리브 위에 수직으로 얇고 길쭉한 기둥들이 솟아있고, 그 기둥은 쭉 뻗은 상판을 받친다.
내가 생각하는 교량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선’에서 나온다.
불필요한 장식은 없다.
딱 필요한 구조만으로 만들어진 깔끔한 미감.
길고 얇은 기둥과 슬림한 상판이 만들어내는 선의 조화가 정말 우아하다.
아치 사이를 연결하는 콘크리트 케이블(?)도 구조적으로 설계된 듯, 리듬감 있게 정리되어 있다.
시크한 백색 콘크리트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균열도 없고, 물자국도 거의 없다. 문화재답게 관리 상태도 훌륭하다.
2. Luís I Bridge
https://maps.app.goo.gl/hJT5ZCWCVeNJYmT5A
콘크리트의 간결한 선이 아름다웠던 아라비다 다리에서 다시 히베이라 광장 쪽으로 향하면,
전혀 다른 스타일의 곡선이 기다리고 있다.
포르투의 랜드마크인 Ponte de Dom Luís I, 루이스 1세 다리이다.
1886년 완공된 이 아치교는 마치 거대한 철제 레이스처럼 도시 위를 가로지른다.
앞서 본 아라비다 다리가 ‘선의 미학’이라면,
루이스 1세 다리는 ‘구조의 서사’다.
철이라는 차가운 재료로 도시의 풍경에 가장 따뜻한 곡선을 만들어낸 다리,
이 다리는 포르투를 여행지로 선택하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우연히 펼쳐본 포르투 여행 책자 속 사진 한 장에는 도우루강 위로 길게 뻗은 철제 아치, 그 위를 걷는 사람들과 노을빛에 반사된 도시의 주황빛 지붕이 있었다.
그 장면 속 메인은 바로 루이스 1세 다리였다.
그 사진 하나로, 포르투는 내 여행지 리스트의 1순위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마주한 이 다리는, 볼 때마다 특별함 이상의 감동을 준다.
설계자는 벨기에 출신 엔지니어 테오필 세이리그로,
에펠탑을 만든 구스타브 에펠의 제자다.
길이 385미터, 아치 경간 172미터, 3,000톤이 넘는 철골 구조는 지금까지도 도시를 안정감 있게 잇고 있다.
아라비다 다리는 콘크리트의 절제된 곡선으로
도시를 조용히 감싸 안는다면,
루이스 1세 다리는 기하학적 긴장감 속에서
도시를 찌르듯 끌어올린다.
한 다리는 묵직한 고요함으로,
다른 다리는 정교한 구조미로
포르투라는 도시의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두 개 층으로 구성된 구조도 인상 깊다.
상부 데크는 트램과 보행자 전용, 하부 데크는 차량과 보행자가 함께 다닌다.
두 층은 서로 다른 리듬으로 도시를 흘러가게 만든다. 윗길을 걷다 보면, 한쪽엔 포르투의 낡은 골목들이,
다른 쪽엔 가이아의 와이너리 지붕이 줄지어 이어진다.
강을 건넌다는 것이 단순한 이동이 아닌, 두 시대를 오가는 경험처럼 느껴졌다.
3. Ponte Infante Dom Henrique
https://maps.app.goo.gl/JeT2GCFS4SFzroR5A
좀 더 강의 상류 쪽으로 가보면 또 하나의 매끈한 콘크리트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는 차량 전용 아치교로, 2003년에 완공된 신식 교량이다. 그래서인지 아라비다 다리와 유사하지만 아치 구조는 하나이고, 아치와 상판 사이에 기둥도 적다, 좀 더 간결하다.
화려함 대신 담백함, 복잡한 구조 대신 매끈한 선.
언뜻 보면 단순하지만, 오래 바라보게 된다.
루이스 1세 다리처럼 기하학적 긴장감을 뽐내지도 않고, 아라비다 다리처럼 선의 리듬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도시의 흐름을 끊임없이 이어준다.
길이 약 371미터, 아치 경간 280미터로 현재 도우루강 위에 놓인 아치교 중 경간이 가장 길다.
4. Ponte Maria Pia(마리아 피아 다리)
https://maps.app.goo.gl/4uEnZ9jjRz3ho8ih7
조금 더 올라가면 루이스 1세 다리랑 비슷한 철제 아치교가 또 하나 보인다. 비슷한 이유가 있다.
1877년,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에펠탑의 다리 부분을 보는 것 같다.
중간 아치를 기반으로 철근이 트러스 형태로 각자 인장력과 압축력을 받으며 균형을 잡고 있다.
에펠의 제자가 만든 루이스 1세 다리는
포르투의 랜드마크로서 유명하지만,
정작 에펠이 설계한 이 다리는 그 설계자의 명성만큼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다.
아무래도 접근성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차로 가기도 애매하고 걸어서 가기에는 조금 멀다.)
길이 354미터, 아치 경간 160미터. 당시 기술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구조였다고 한다.
포르투와 세계를 처음 철도로 연결한 다리,
이 철제 아치교는 도시의 가장 깊은 기억을 품은 다리다. 누구보다 길고 묵직하게 도시의 시간을 지켜봐 왔다.
그러나 지금은 기능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그 위로 기차가 지나지 않는다.
화려했던 젊은 날을 보내고 이제는 은퇴한 왕년의 스타처럼, 그냥 강가에 조용히 서서 다른 교량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답다.
5. Ponte de São João
https://maps.app.goo.gl/wcrd3eea1q8zXvKG7
더 상류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슬쩍 시선을 비껴가던 다리가 하나 있다.
상 조앙 다리, Ponte de São João. 다.
말수가 적고, 드러내지 않는 다리다.
1991년에 완공된 철도 전용 교량으로,
기차만 다니는 다리다.
위에서 소개한 에펠의 마리아 피아 철교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겉으로는 그런 역사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콘크리트 아치 하나가 강을 조용히 가로지르고,
그 위에 철로가 길게 얹혀 있다.
불필요한 기둥도, 장식도 없다.
정말 지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실용적인 다리다.
아치구조가 아닌데도 교각 두 개가 긴 경간의 상판을 자티고 있다. PS 강선으로 강하게 잡아당긴 걸까? 이제 보니 우리나라 보통의 교량과 달리 교량 받침대(shoe)가 없이 일체형으로 라멘 구조인 것도 독특하다.
이처럼 토목 기술의 정수가 담겼지만 가장 알려지지 않고 묵묵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다리, 괜히 안쓰러워서 더 정이 갔다.
그동안 포르투의 교량이 멋지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우연히 둘러보며 나도 모르게 의외의 매력을 발견한 것이다. 이게 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여행자의
마음마다 새겨진 도시의 이미지는 다양할 것이다.
나에게 포르투는 여러 가지의 선과 곡선으로서, 오랫동안 기억 속에 새겨져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