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르투갈 여행 다짐하기.
나는 프로 도피러다.(여기서 도미노 피자를 떠올렸다면 당신은 먹짱)
나는 늘 무언가로부터 도피해왔다. 그런데 도피해온 곳에서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그곳에서도 나는 계속 도피했다. 그렇게 몇번의 도피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앞으로 나는 또 무엇으로부터 도피해서 어디에 다다를까?
나는 학업에서 도피해서 입대했다.
대학시절, 봄으로 물든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하늘이 맑고 바람이 따뜻했다.
이런 날씨엔 공부보다 군대 훈련이 더 재밌을 것 같았다.
짐을 싸고 바로 기숙사로 갔다. 컴퓨터를 켜고 가장 빠른 날로 입대 신청을 했다.
그렇게 1개월 뒤, 입대했다. 회피성 입대였다.
이 즉흥적인 결정 덕분에 군생활 자체는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좋은 사람들과 재밌게 군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평생의 친구들을 얻게 되었다.
나는 취준에서 도피해서 고시공부를 했다.
보통 전역하면 정신 차린다고 한다.
취업을 위해 학점관리, 자격증 취득, 봉사활동, 대외활동 등을 한다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인가 싶고, 귀찮았다.
덕분에 취업을 앞둔 나는 학점이 여전히 낮았고 인생에서 이루워 낸 것이 없었다.
이젠 이런 더러운 취업시장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친구와 캠퍼스를 산책하던 어느 날, 우연히 행정고시 합격 플랑카드를 보았다.
합격자의 학번은 99학번, 01학번.. '나와 10학번 차이나는 사람들이니ㅡ
내가 지금 시작한다고 해도 10년은 걸리겠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부러워했다.
이런 내 모습에 친구는 행정고시 합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나는 고시생 선배에게 들은, 행시출신 5급 사무관의 위엄(?)을 과장해서 떠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는 다시 되물었다. "근데 너는 못할 것 같아?"
요즘말로 조금 긁혔던 것 같다. 나도 나름 공부 잘했는데 왜 모양 이꼴이 됐지?
생각해보니 학점관리하고 자격증 취득하는 와중에 마음에도 없는 봉사활동, 대외활동을 하면서 기약도 없이 취업준비하느니, 시험 한번 잘봐서 고위공무원 되는게 더 마음편할 것 같았다.
"그렇네, 내 학점으로 취업하는 것보다 고시 합격이 더 쉬울 것 같네."
이말을 뱉으며, 나는 행정고시 준비로 또 한 번 현실을 도피했다.
"근데 너는 못할 것 같아?" 이 말은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 불이 내 인생을 나락으로 가게 할지, 성공으로 이끌지는 아직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불이 크게 났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패배의식에 절여져, 내 한계를 내가 정하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바로 기숙사로 가서, 컴퓨터를 켜고 행정고시 접수 날짜를 확인했다. 운명처럼 그날이 1차 접수 마지막날이었다. 동기 카톡방에 대뜸 글을 올렸다.. "나 행정고시 준비한다." 그 후 4년이라는 끝도 안 보이던 고시라는 터널 속을 지나, 합격이라는 빛을 보았다. 그렇게 지방자치단체의 사무관이 됐다. (이렇게 내 인생이 피는 줄 알았다.)
고시 합격 후에도 많이들 도피한다.
내 동기는 300명 가까이 된다. 즉 매년 300명 가까운 행정고시 출신 사무관이 탄생한다.
이 중 장관, 국회의원 등 이른바 '성공'하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한 기수당 많이 나와야 1-2명일 것이다. 눈을 낮춰 차관만 해도 한 부처에 많아야 7-9명, 적으면 1명이다.
더욱 눈을 낮춰 중앙부처 국장, 즉 고위공무원이 되기도 쉽지 않다.
나라에서 인정한 인재들은, 이 확률 낮은 가능성을 위해서
쥐꼬리만 한 봉급을 받으며 평생을 매일같이 날을 새며 일한다.
또 서로를 까내리며 여기저기 정치권에 줄을 댄다.
모든 사회생활이 다 그렇게 치열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문제는 나와 학창시절 성적이 비슷했던 친구들은 변호사, 의사가 되어
내 연봉을 한 달 만에 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애국심, 자긍심, 명예 등에 대한 가치는 많이 퇴색했다.
그래서 많은 동기들이 퇴사했다. 회계사, 로스쿨, 약대, 의대 등 전문직이 되기 위해 떠났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웃지 못할 말도 퍼졌다.
미생의 천과장은 차장 자리의 의자를 훑고 앉아보며 회사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는 다른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음에도 현실에 남기로 결정한다.
가장 현실적인 결정을 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현실 도피와 즉흥적인 결정이 어려워진다.
흔히들 30대 초중반이 다시 시작하기에 어린 나이라고도 하지만,
이중에는 조회수를 높이기 위한 유튜버와 작가의 거짓된 선동도 섞여있다고 본다.
책임져야 할 가족의 얼굴과 매일같이 나가는 고정지출을 보면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넘어 현실에 매달리게 된다.
어린 나이에 높은 직급으로 일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특히 고시 출신이 별로 없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더욱 그렇다.
가장 힘든 것은 시기 질투다. 숨만 조금 크게 쉬어도 건방지다는 말을 듣는다.
동일 직급 내 경력이 훨씬 많음에도, 나이가 30대 후반임에도,
누가 봐도 열심히 일했고 성과를 올렸음에도, “경력이 적고 어리다.”는 한마디로
나의 승진 순위는 근무 평가 때마다 후퇴했다.
문제는 이런 평가가 조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로 퍼진다.
소문이 사실로 바뀌어 평판이 되는 것은 의외로 쉽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먼저 믿는다.
'내가 이런 시골에서 이런 취급받을 사람이 아닌데'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럴 땐 소소하게 도피하면 된다.
그날은 근무성적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역시 연차와 성과에 비해 성적은 형편없이 낮았다. 일을 그만하고 싶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더 이상 사무실에 있기 힘들었다. 컴퓨터를 끄고 창문을 바라보며 화를 가라앉혔다.
이번엔 어디로 도망갈까를 생각했다. 컴퓨터를 다시 켜고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한국에서 직항으로 갈 수 있는 곳 중 가장 먼 곳의 비행기표를 끊었다.
결제 후 과장님 자리로 향했다. 평소보다 조금은 크게 보고 드렸다.
“다음 주에 포르투갈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소소한 도피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