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포르투갈의 시장, "리스본 도둑시장"
한국에서 플리마켓을 주최해 본 적이 있다.
플리마켓을 열었던 장소는 한 때 번성했지만 지금은 쇠퇴한 도심이었다. 이곳에 뜬금없이 플리마켓을 연 이유는 이곳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리마켓의 개최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마을의 콘텐츠를 활용한 축제를 통해 주민 자립 역량을 높이는 것, 두 번째는 타 지역 시민들의 방문을 유도하여 지역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플리마켓은 내 생각과 다르게 진행됐다.
사업을 기획하며 나는 손재주 좋은 마을 주민이 본인의 소품을 전시하거나, 숨겨진 맛집 사장님이 음식 솜씨를 뽐내는 풍경을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주민들이 운영하는 부스는 일부였고 대부분은 플리마켓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의 차지였다. 이분들은 축제시즌에 여기저기 열리는 플리마켓을 돌아다니며 전문적으로 장사를 하는 분들이었다. 물론 이분들이 SNS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한 덕분에 마켓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또 여러 차례 플리마켓 경험이 있던 분들인지라 행사를 주최하는 입장에서도 비교적 쉽게 행사의 질서를 잡을 수 있었다. 덕분에 겉으로 보기에 성공적으로 행사를 끝났다. 다만 주민이 중심이 되어야 할 행사에 외부인이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마냥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사업의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플리마켓의 정석을 리스본에서 경험했다.
국립판테온 앞에서는 도둑시장이 열린다.
리스본 도둑시장은 화요일과 토요일에 열리는데 마침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나와 아내는 시차 적응에 절반정도 실패해서 일찍 일어났다. 덕분에 포르투행 기차 탑승까지는 6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뭐 하나 싶어 도둑시장으로 향했다. 도둑시장은 국립판테온 바로 옆에서 열린다. 그래서 도둑시장이 열리는 날에 방문해서 판테온도 같이 보고 오는 코스를 추천한다. 다소 으스스하고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판테온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이른 아침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땅바닥에 물건을 전시하고 있었다.
진짜 파는 것이 맞는지 의심되는 물건을 판다.
최근에 봤던 유튜브 숏박스의 '편집샵' 에피소드를 보면 쓰레기를 판매하는 물건으로 착각하고, 판매하는 물건을 소품으로 착각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가 딱 그렇다. 여기 올려둔 물건들이 실제 판매하는 것인지, 본인이 사용하는 어떤 것을 올려둔 것인지 헷갈렸다. 또 바닥에도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두고 먼지가 짙게 쌓여있어서 예전부터 여기에 버려진 폐기물인지 이분이 가져오신 물건인지도 헷갈렸다. 근데 그래서 재밌었다. 여기에 있는 물건들은 공장에서 다량으로 찍어내지 않는, 세상에 한 개밖에 없는 물건이 대부분이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말 그대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종류가 워낙 많아 발품만 팔면 여기서 필요한 모든 것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계획적인 쇼핑은 어렵다. 장롱 손잡이와 육각렌치, 시계, 거울을 그냥 한 곳에 몰아넣고 판다. 그래서 물건을 사려면 발품을 팔아야 한다. 호객행위가 전혀 없어서 어디서 무엇을 파는지 파악하기도 힘들다. 판매하러 나오신 분들은 같이 나온 강아지와 흘러가는 시간을 즐기거나 주변 분들과 수다 삼매경이다. 누군가 와서 말을 걸면 그때 대답을 해준다. 장사가 목적이 아니라, 와서 놀기 위한 구색을 갖추기 위해 집에 있는 아무 물건이나 늘여놓은 느낌이다.
여기가 타일 박물관이다.
포르투갈은 아줄레주가 그려진 타일이 유명하다. 유럽치고 날씨가 습해서 건물 외벽에 타일을 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타일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타일이 아닌, 각자의 개성을 담은 그림과 무늬가 있는 것을 붙인다. 그래서 집마다 외벽의 색과 무늬가 다르다. 여기 도둑시장에서는 그렇게 실제 집에 붙어있던 타일을 판다. 집에서 떼왔는지, 재건축할 때 사 왔는지는 모를 노릇이다. 실제 쓰던 제품이라 모서리가 깨지고 색이 바랬다. 기념품샵이나 타일박물관에 있는 타일과는 다른 날것 그대로의 바이브다. 하나 사고 싶었지만 아내의 만류에 사진 못했다.
대신 예쁜 그릇을 하나 샀다.
포르투갈은 도자기에 진심이다. 한 부부가 하는 점포 앞을 구경했는데, 여기서 파는 그릇은 모두 핸드메이드라고 했다. 그래서 같은 제품이라고 생각했던 그릇들도 조금씩 그림이 다르고 제품의 상태도 제각각이었다. 여기서 올리브 접시를 샀다. 여행 첫날이라 되도록 사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올리브 접시에는 첫눈에 반했다. 올리브를 놓는 곳에 올리브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올리브 씨를 놓는 곳에 올리브 씨가 그려진 귀여운 그릇이었다. 집에서도 이 그릇만 보면 포르투갈의 따뜻함과 시장의 분주함이 떠오른다. 여기는 마지막날 오는 것을 추천한다.
이런 독특한 행사 덕에 화요일과 토요일에 판테온 일원은 북새통을 이룬다. 덕분에 리스본 도심에서 다소 떨어졌음에도 거리에 활력이 넘쳤다. 내가 상상했던 플리마켓은 이런 것이었다.
도둑시장 올라가는 길에 포르투갈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골목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빵집에 들어갔다. 빵은 심심하니 좋았지만 커피는 출근을 생각나게 하는 맛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 카누 맛이었다.
도둑시장을 구경하고 국립 판테온을 방문했다.
판테온까지는 산타아폴로니아 역에서 대략 10-15분 거리다. 오픈 시간은 구글맵에서 9시라고 쓰여있지만 실제로는 10시에 문을 연다.(우리가 9시쯤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직원이 나와서 알려줬다.) 리스보아카드가 있으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없어도 출입구로 들어가 바로 왼편에 있는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입장할 수 있다. 오픈런을 해서인지, 비수기라서인지, 혹은 볼 게 별로 없어서인지, 생각보다 관광객이 많지는 않았다. 덕분에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입장했다.
판테온에는 바스쿠 다가마와 엔리카 왕자가 있다.
판테온 1층에는 바스쿠 다가마와 엔리케 왕자의 무덤이 있다. 바스쿠 다가마에 대한 평가는 갈리지만, 대 항해 시대를 열고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포르투갈 역사의 하이라이트에는 바스쿠 다가마가 있었다. 어쨌든 포르투갈인들에겐 영웅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포르투갈을 여행하는 여기저기에서 바스쿠 다가마를 기리는 조형물을 볼 수 있었다.
판테온은 외부보다 내부가 진짜다.
사실 판테온은 블로그에서 옥상 전망이 좋다는 리뷰를 봐서 방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옥상을 가는 도중 뜻 밖에 내부 인테리어에 반했다. 건물은 웅장했다. 둥근 천장 돔과 바닥의 둥근 디자인의 상하 대칭, 건물 내부의 좌우 대칭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사람도 별로 없어서 사진 찍기 좋았다. 다만 옥상 전망대는 기대보다는 별로였다. 물론 날씨가 흐려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날씨 탓을 할지라도 강원도나 남해바다에서 봤던 바닷가 뷰보다 멋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시 내가 포르투갈 전망에 대한 환상을 너무 많이 안고 온 것일까?
이제 본격적인 여행을 위해 포르투로 떠난다.
도둑시장과 판테온을 보는데 3시간 정도 소요됐다. 이렇게 간단한 오전 관광을 마치고, 체크아웃 후 이제 포르투로 떠난다. 낮에 다시 보니 산타아폴로니아 역이 참 예뻤다. 빨간색 벽이 탁월했다. 이렇게 공공건축물에 과감한 색을 쓰는 것은 사실 우리나라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독창적인 색채를 사용했더라도 각종 위원회 심의를 통해 결국에는 우리가 아는 그런 건물이 되고 만다. 아름다운 역은 조만간 다시 보기로 하고, 포르투행 AP기차를 탔다. 기차가 미리 와있어서 우리 기차가 아닌 줄 알았지만 맞았다. 큰일 날 뻔했다. 이제 포르투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