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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점빵(2)

너는 내 운명

by 계쓰홀릭 Mar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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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적성

  매주 목요일은 마침 우리 동네 분리배출일이기도 해서, 일주일간 쌓인 각종 쓰레기를 정성스레 분류해서 내어놓으면서 쓰다점빵에 가져갈 것까지 챙겨 나온다. 4시간 이라는 짧은 오픈 시간 동안 꽤 많은 어르신들이 쓰레기봉투로 바꿔가시는 모습을 보면, 나도 귀찮은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고 가게 된다.

형광 연두색 조끼를 입고 쓰레기봉투를 나눠주시는 아저씨께서는 어쩜 이렇게 정성스럽게 150장을 다 잘 펴서 말려왔느냐고 감탄하시며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 한 장 더 서비스로 주신 적도 있다. 우유를 왜 이렇게 많이 먹느냐고도 물으셨지만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나는 어느새 잘 마른 우유팩의 이음새를 따라 쭉쭉 펼쳐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에는 달인이 되어있었다. 이것은 매일 아침 출근해서 하는 첫 번째 루틴이기도 했는데, 문제는 이 쓰다점빵이 계절을 탄다는 것이다. 한여름인 8월 한 달과 12월 ~ 2월 사이에는 날씨 탓인지 쓰다점빵의 운영이 중단된다. 아이들에게 쓰레기봉투는 마지막으로 나눠주면서, 이제 쓰다점빵이 문을 열지 않으니 우유통을 씻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이미 습관으로 자리 잡아 잘 고쳐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 마신 우유팩은 입구를 오므려 닫고, 우유바구니에 다시 넣으면 되는 건데 이 아이들은 입학 이후로 쭉 다른 방식으로 모아 왔기 때문에 일 년이나 지난 당시에 새로이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집에 가고 나면 씻어서 엎어진 우유팩 몇 개가 창틀에 성실하게도 쪼르르 줄 서있곤 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깨끗한 우유팩을 굳이 급식실에 내는 것도 새삼 어색해서 쓰다점빵의 운영 여부와 관계없이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 그것을 모으게 되었다. 그렇게 2월이 다 지나 종업을 했고, 교실을 비워야 해서 그동안 모은 우유팩은 일단 우리집 뒷베란다로 옮겨졌다. 방학 내내 집에서 가족과 마시는 우유팩도 크건 작건 펼쳐서 습관처럼 모으고 있으니, 남편은 목요일에 그냥 우리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싹 내다 버리자고 했다.


  ‘여보, 그동안 모은 게 얼만데 조금만 더 하면 쓰레기봉투 세장이라고요! 아저씨가 나더러 보통 정성이 아니라면서 한 장 더 주신 적도 있다고요.’

  지저분한 것을 참지 못하는 깔끔한 남편의 눈치를 살피느라 우유팩을 세탁기 구석 창가에 조심스레 모으며 나는 새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해 봄이 되어 다시 쓰다점빵이 문을 열었다. 그동안 모아둔 우유팩을 가져가서 쓰레기봉투로 바꾸어왔지만 어쩐지 딱 150개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날이 없이 조금 남아서, 다음까지만... 또 다음까지만... 하며 거의 1년 동안 '쓰레기 다이어트'는 등 떠밀리듯 이어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쓰레기봉투를 돈 주고 산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 우리 집 가정경제에도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다.


  작년에 새로 맡은 6학년 아이들 중에는 5학년 때 우유팩을 모아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도 있어서 "선생님, 저희도 우유팩 모아서 쓰다점빵 가면 안 돼요?" 하고 먼저 묻기도 했다. 고학년 담임에 대한 압박감과 함께 여러 가지 중요한 업무도 맡게 되어 더 이상 교실에서 쓰다점빵을 진행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다. 19명 중에 우유 미급식인 학생도 꽤 많고, 다양한 이유로 우유를 남기는 날도 많아서 나중에 쓰레기봉투를 누구에게만 주고 누구는 주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학급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로 더 이상 쓰다점빵을 진행하지 않았지만, 가정에서 일주일에 몇 개씩 나오는 우유팩을 보면 어쩐지 그냥 갖다 버리기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생각날 때마다 폐휴지함에서 꺼내어 따로 모으기 시작했다.


폐건전지도 된다고요?

  며칠 전, 쓰다점빵 자리를 지나가다 운명처럼 2025년 3월 13일부터 다시 운영을 시작한다는 입간판을 발견했다. 우유팩 말고 다른 물건들로도 교환이 되다는 정보가 있길래 저장하려고 휴대폰을 꺼내어 드니 예전에 나에게 서비스로 봉투 한 장을 더 주셨던 형광조끼 아저씨가 나타나셨다.

  "오늘은 홍보기간이고, 다음 주부터 해요. 다음 주에 오세요."

  "네, 꼭 올게요!"

브런치 글 이미지 1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자동차에 진심인 둘째 덕분에 우리 집은 건전지 소비량이 어마어마하다. 폐건전지만 따로 모아두는 플라스틱 통에 몇 개가 있는지 집에 가서 당장 세어보았더니 100개도 훨씬 넘는 양이었다. 부피가 큰 우유팩 150장보다 폐건전지 60개가 훨씬 가져가기도 좋았다. (폐건전지는 20개당 쓰레기봉투 1장이고, 인당 하루 최대 3장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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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건전지 60개와 바꾼 10L 쓰레기봉투 3장

  그렇게 올해도 나의 ‘레기 이어트 점빵’ 이용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썩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시작하게 되었고, 하다 보니 은근한 중독성이 있어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휴직을 시작하면서 시간과 마음에 여유가 생긴 이때, 동네 어귀에서 발견한 재오픈 소식과 때마침 꽉 차서 더 이상 들어갈 공간도 없던 우리 집 폐건전지함은 마치 나에게 쓰다점빵에 꼭 가라고 사인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한동안은 쓰레기봉투 살 일은 없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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