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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조선사

1. 고려 말 이성계 장군(10)- 신돈의 아들

by 나루터 Feb 28. 2025

군사 정변이었다.


"물이 불어나 군대가 오도가도 못할 상황에서 수백명이 익사했습니다. 군량미도 떨어졌습니다."


수차례의 상소를 무시한 결과는 참혹했다.


원정군은 위화도에서 개경까지 400KM 남짓한 거리를 10일만에 주파했다.


그나마 개경의 성벽이 높고 두터워 원정군을 잠시 막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전력 차이와 구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공성 병기가 도착하는 시점에는 개경의 성벽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다.


이성계와 조민수의 군대가 기세 또한 우위였다. 최영의 측근이 방어하던 전략적 요충지는 너무 쉽사리 떨어지고, 수비군은 도망쳤다. 그리고 그것으로 개경 공방전의 성패는 그대로 끝이 났다.


마지막을 직감한 우왕은 내시들을 무장시켜 이성계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야말로 객기였다. 사실 그곳에는 이성계가 지킬 가족들도 없었다. 아들 이방원이 둘째 어머니와 가족들을 이미 피신시킨 것이다. 설령 이성계를 찾아 죽였다고 한들, 정변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영은 고문 끝에 참수를 당했다.


"만약 내가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무덤에는 정말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우왕이 폐위되고, 조민수는 이성계와 갈라져 창왕을 옹립한다. 창왕은 9세 밖에 되지 않는 어린나이였지만, 자기 생각이 확고했다. 얼마 되지 않는 재위 기간에는 신진사대부들이 국정을 장악하여 많은 개혁 정책을 입법하고, 제도를 고쳐나갔다. 창왕은 제도 개혁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그러나 창왕은 한편으로는 아버지인 우왕의 복위를 몰래 획책하고, 자주 우왕과 회동했다. 그러다 하필이면 걸렸다.


정몽주도 창왕을 변호하지 않았다.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씨라고 했다. 신돈의 아들이었다.


물론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우왕의 어머니가 신돈의 시녀로, 정식 부인과의 소생이 아니기에 고려 왕실에서는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여기기는 했다.


그를 왕으로 만든 것은 아버지 공민왕의 고집과 이인임이었고,  최영마저 죽자 그를 비호해줄 사람은 없었다.


이제 그는 왕우가 아닌 신우였다. 아명은 모니노. 석가모니의 종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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