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 말 이성계 장군(11)- 마지막 왕
우왕과 창왕을 내려야 할 필요성을 더욱 느낀 것은 바로 이인임 일파 때문이었다. 임견미, 염흥방 등의 그의 심복들은 몽둥이로 때려 같은 권문세족의 땅을 빼앗을 정도로 탐욕적이고, 고려를 망친 주범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힘은 고려 왕실을 지탱하는 최후의 힘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권력이 고려를 망치고, 그나마 왕실을 버티게 하다가, 멸망을 앞당기게 한 셈이다.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정창부원군 왕요였다. 그는 원래 유복한 왕족으로, 왕위에 오를 생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왕위 계승자이자 이성계와 사돈 관계라는 그의 신분이 그를 마지막 왕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성계가 찾는 적임자였다.
왕요는 왕위에 오르자 태도가 바뀐다. 본래의 욕심을 숨긴 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이성계의 꼭두각시로 오른 왕위일지라도, 왕 노릇을 하고 싶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왕 다운 왕이 되기에는 이미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이 고려의 모든 권력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과전법 등 여러 개혁으로 인해 그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신망도 높았다.
왕요가 눈치를 보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성계 일파가 하려는 것을 우유부단하게 지켜보거나, 아니면 개혁에 어물쩍 한번씩 태클을 놓는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왕위를 지키는데 도움되는 일은 아니었다. 왕요의 의지와는 다르게 고려라는 나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서 어떤 선택을 하든 가망성 없는 일이었다.
이성계는 고려의 거의 모든 군사권을 틀어쥐고 있었고, 조정 관료는 이성계와 친하거나 우호적인 인물들로 전부 채워졌다. 진심을 숨긴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결국 정창부원군 왕요의 최후는 이성계가 원하는 대로 왕위를 평화롭게(?) 양위하고,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부인과 자식들과 함께 사사당하는 것이었다.
묘호는 없었고, 이성계가 그에게 내린 시호는 공양왕이었다. 공손하게 양보하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