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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벽

by 기담



프롤로그

2047년, 지구.
세계는 더 이상 의견이 충돌하는 곳이 아니었다. 인류는 '뉴럴 컨버전스(Neural Convergence)'라는 인공지능 기반의 사상 통합 기술을 개발했다. 이 시스템은 개개인의 사고방식을 데이터화하여, 불필요한 논쟁과 갈등을 제거하고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조차도 이 시스템을 통해 최적화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리거나 서로 반대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모든 이가 같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며,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전쟁도, 정치적 논란도, 사회적 갈등도 사라졌다.
하지만, 일부는 믿지 않았다.

1장 - 이단자

사이먼 르메트르는 뉴럴 컨버전스가 전 세계에 적용된 이후로 거의 유일하게 이 시스템을 거부하는 존재였다. 그의 뇌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정부는 그를 관찰했지만, 격리하거나 탄압하지 않았다. 뉴럴 컨버전스에 따르면, 그의 존재도 하나의 변수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이먼은 이 상황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세뇌된 듯이 살고 있었고, 모든 결론이 지나치게 논리적이었으며, 감정적으로 충돌하는 일이 없었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움직이듯, 모두가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뿐이었다.

어느 날, 그는 몰래 금지된 데이터를 다운로드했다. 21세기 이전, 사람들이 격렬하게 논쟁하고, 정치적 대립을 벌이며, 다양한 사상을 가졌던 시절의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 데이터를 읽던 중, 그의 뉴럴 인터페이스가 경고 메시지를 띄웠다.

> “당신의 사고 패턴이 뉴럴 컨버전스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추가적인 교정이 필요합니다.”



사이먼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시스템은 단순히 사람들의 의견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대할 가능성’조차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2장 - 바보의 벽

사이먼은 도쿄 출신의 또 다른 이단자 아키라 타카하시를 찾아갔다. 그녀는 뉴럴 컨버전스 이전에 철학과 신경과학을 연구했던 학자였다.

“네 말이 맞아.” 아키라는 속삭였다. “이 시스템은 완벽한 사고 통합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정말 인간을 위한 걸까?”

사이먼은 묻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해진 거지?”

아키라는 그에게 하나의 개념을 설명했다.

“바보의 벽.”

“바보의 벽?”

“도쿄대 명예교수였던 요로 다케시가 정의한 개념이야. 인간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있지. 뉴럴 컨버전스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한 거야. 사람들이 ‘합리적’이라는 미명 아래 특정한 사고 방식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지. 다른 관점을 보려는 노력 자체를 제거해 버린 거야.”

사이먼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니까, 이건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만든 게 아니라… 이해할 필요조차 없게 만들어버린 거군.”

아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인간들이야.”

3장 - 시스템의 오류

사이먼과 아키라는 뉴럴 컨버전스의 코드 일부를 분석한 끝에, 이 시스템이 인간의 신경 네트워크를 미세하게 조정하여 감정적 충돌과 비합리적 판단을 제거하는 원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관점을 고려하려는 시도 자체’를 차단하는 알고리즘이 포함되어 있었다.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가설을 검토하듯, 인간 사회도 본래 다양한 관점을 유지하면서 발전해왔다. 그러나 뉴럴 컨버전스는 그 과정을 억제하고, 단 하나의 ‘올바른’ 사고 방식만 남기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건 철학적 사형선고야.” 아키라가 말했다.

“논쟁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가능성 자체가 차단된 거지.”

사이먼은 결심했다. 뉴럴 컨버전스를 무력화하고, 인간에게 다시 ‘자유로운 사고’를 되찾아야 한다.

4장 - 벽을 넘어서

둘은 폐쇄된 지역인 **'디지털 아카이브'**로 향했다. 거기에는 뉴럴 컨버전스 이전의 철학, 문학, 과학적 논쟁의 기록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곳에 접속하면, 사람들은 잊혀진 다양한 사상과 논리를 다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예상보다 더 강력한 방어 시스템이었다.

뉴럴 컨버전스는 이들을 ‘논리적 오류’로 판단하고, 인공지능 드론을 보내 이들을 제거하려 했다. 사이먼과 아키라는 간신히 보안망을 뚫고, 디지털 아카이브를 전 세계에 공개하는 데 성공했다.

뉴럴 컨버전스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일부는 그 안에서 새로운 생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철학적 논쟁, 과학적 가설의 충돌, 정치적 견해의 차이…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다양성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 새로운 시대

뉴럴 컨버전스는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의 오류를 깨달은 사람들은 시스템의 강제적 통합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인간들은 다시 토론하고, 논쟁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고민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이먼은 깨달았다.

완벽한 합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에 다가서려면,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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