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부장판사 <법정의 얼굴들>
법정은 흔히 유무죄를 가리는 냉철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기사의 한 줄과 판결문의 몇 줄로 압축된 사건은 그 이면에 자리한 복잡한 인간 군상과 이야기를 지우고 만다. 박주영 판사의 『법정의 얼굴들』은 그 잊혀진 얼굴들과 그들의 서사를 조명하며, 법정이 단순한 심판의 장이 아니라 삶의 한 단면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법정에서 만난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간과해 온 인간적 고통과 사회적 책임을 되새기게 한다.
법정은 가해자와 피해자, 판사와 변호인, 검사와 방청객이 교차하는 복합적 공간이다. 『법정의 얼굴들』은 이들이 단순한 법적 대상이 아니라 저마다의 삶을 가진 존재임을 강조한다. 저자는 판결문에는 담기지 않는 그들의 고통과 희망, 좌절과 용서를 기록하려 한다. 법정 밖에서는 단순히 "징역 몇 년"으로 정리될 사건들이 저자에게는 한 사람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가 된다.
책 속의 다양한 사례들은 법적 정의와 인간적 연민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게 한다. 예컨대 마약중독자의 재활 가능성을 믿는 판사의 신념, 학대당한 아이의 삶을 되돌아보는 법정의 시선,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 등이 그러하다. 박 판사는 한 명의 인간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일과 같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판결을 내린다.
저자는 판결문이 종종 피해자의 눈물과 고통을 담아내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피해자의 상처는 간단한 형량으로 치유될 수 없으며, 사건의 영향은 피해자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박 판사는 판결문을 쓸 때마다 부고를 쓰는 것과 같은 심정을 느낀다고 한다. 죽은 자를 기리고, 산 자를 위로해야 하는 판사의 역할은 단순한 법적 판단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법정에서 만난 피고인들의 서사를 최대한 존중하려는 저자의 태도다. 그들은 단순한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각자의 이유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는 법의 이름으로 이들을 판단하는 동시에, 그들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려 한다.
법정의 기능은 단순한 처벌을 넘어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있다. 『법정의 얼굴들』은 이 과정에서 판사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저자는 법의 냉혹함과 인간의 따뜻함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한다. 범죄자를 벌하는 것이 법의 목적이 아니라, 재범을 막고 사회로의 복귀를 돕는 것이 궁극적 목표임을 강조한다.
예컨대, 정신질환을 앓다가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에 대한 이야기는 법적 처벌이 아닌 사회적 지원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형량을 넘어선 문제이며, 법의 경계를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책을 읽으며 독자는 법의 엄격함 뒤에 숨겨진 인간적 고민을 이해할 수 있다.
책은 또한 법정 바깥의 세계를 조망하며, 법의 울타리 밖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부조리와 불공평을 조명한다.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하고, 가해자는 쉽게 빠져나가는 현실 속에서, 저자는 법이 진정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문한다. 법정에서 마주하는 사건들이 결국 사회의 축소판임을 책은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 아동 학대, 사회적 약자의 보호 문제는 『법정의 얼굴들』에서 중요한 테마로 다루어진다. 판사는 사건을 심리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쓰지만, 법의 한계로 인해 그들을 온전히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기도 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법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정의 얼굴들』은 단순한 법조인의 에세이를 넘어, 법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박주영 판사는 사건 하나하나에 담긴 인간적 비극과 희망을 통해 법이 어떻게 사람을 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저자는 법이 냉혹한 칼날이 아니라, 때로는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법조인뿐만 아니라, 법을 공부하는 학생들, 그리고 사회 정의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법은 단순히 죄를 심판하는 도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법정의 얼굴들』은 강력히 시사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법정의 판결문 이면에 숨겨진 얼굴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법적 판단이 아닌, 인간적 고민과 윤리적 딜레마가 얽힌 이야기다. 『법정의 얼굴들』은 법과 정의, 그리고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소중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