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연말
반려. 벌써 4번째 반려다.
당최 승인이 떨어지질 않는다.
반려자는 심상무. 출장 중에 있는 그의 부서장이다.
반려 사유란에 이렇게 적혀 있다. '개정된 규정에 대해 더 상세한 자료를 첨부하라. 그리고 기안의 글이 문맥상 이해하기 어려우니 더 가독성 있는 문장으로 수정해서 다시 제출하시오.'
억지다. 관련 규정을 출력하여 첨부한 것은 물론 타 회사의 유사한 사례까지도 찾아내 첨부해 올렸다. 문장은 말할 것도 없다. 즉, 애당초 서류는 문제가 없었던 거다. 언제나 그렇듯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김 과장은 시계를 올려다본다. 6시 30분 전. 6시가 되면 팀원들은 퇴근을 할 것이다. 지금 결재가 난다 해도 김 과장은 거의 혼자서 내일까지 미팅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같이 만들면 한두 시간이면 끝나겠지만 혼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저녁을 거르고 꼬박 만들어도 12시 전에는 퇴근이 불가하다. 그런데 지금 반려라니!
김 과장은 심상무의 뜻을 알고 있다. 이건 압박이다. 팀원들을 남겨서 같이 야근하라는 비겁한 전략이다. 하지만 팀원들을 동원할 수는 없다. 물론 김 과장이 이야기하면 팀원들은 내 지시에 잘 따라 줄 것이다. 그걸 알기에 더 티 낼 수가 없다. 잠시 일어나 직원들과 간단히 퇴근인사를 하고 나서 다시 자리에 앉는다.
혼자가 된 김 과장은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걸려올지 모를 전화를 기다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욕먹을 시간이구만.' 30분쯤 지나니 역시 전화가 걸려온다. "반려 안 할 테니 결재 올려." 이 말만 하고 바로 끊는다. 출장지에서 저녁 약속이 있는 듯싶다. 아니었으면 30분은 수화기로 잔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내용은 뻔하다. '팀워크는 혼자서 남는 게 아니다. 야근도 같이하면 즐겁다. 직원들 교육도 중요하다.' 등 수십 번도 더 반복했던 창과 방패의 싸움. 아직 방패는 진적이 없다. 어김없이 부하들을 퇴근시킨다. 창은 그런 방패가 야속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창은 방패를 오늘도 찌를 수밖에 없다. 만약 이렇게 혼자 야근해서 일을 처리하는데 실수라도 생겼으면 진작에 사달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얄밉게도 김 과장은 실수를 잘하지 않는다.
직급이 낮은 자가 직급이 높은 자를 이기는 방법은 단 하나다. 더 많은 시간을 쏟으면 된다. 그러면 좋은 결과도 자연스레 따라온다. 오늘도 방패는 자신에게는 저녁 없는 삶과 야근을, 그리고 부하직원들에게는 정시퇴근을 선물한다.
방패는 언제나 한 시간 일찍 나온다. 오자마자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간단한 답장을 한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아침에 간단히 청소를 하고 난을 돌보고 커피를 한잔 타서 마시며 책을 읽는다. 커피를 다 마실 때쯤 팀원들이 차례대로 출근하기 시작한다. 첫째는 지대리이다. 머리가 좋고 실수하는 법이 없다. 예쁘장한 외모와 그에 맞는 발랄한 성격으로 직원들에게 인기가 좋다. 거기에 기억력도 좋아서 한번 들은 말은 잘 잊어버리지 않는 능력까지 있다. 두 번째는 석주임이다. 어떤 경우에도 선임들의 말을 거역하는 법이 없다. 어떤 무리한 부탁에도 당황하지도 짜증 내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방법을 찾고 또 찾는다. 가장 믿음직스러운 직원이다. 세 번째는 유사원이다. 들어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가장 젊은 직원답게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거나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눈치를 보지 않고 개그를 칠 수 있는 담력도 갖고 있다. 가장 독특한 캐릭터이다. 김 과장은 우리 팀이 너무 좋다. 되도록 오래 보고 싶은 아이들이다. 이들도 방패의 그 마음을 잘 아는 것 같다.
오늘은 출장을 갔던 심상무가 돌아오는 날이다. 한창 바쁜 시기에 출장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김 과장이 성장했다고 상부에서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김 과장은 어떻게 맞을지 고민 중이다. 감사 시즌 내내 팀원들과 같이 야근한 횟수는 단 두 번이다. 웬만하면 매일 야근을 하라고 지시했던 심상무의 말을 완전히 거역한 셈이다. 또 회계사들과 회식도 한 번밖에 하지 않았다. 그것도 1차에 간단히 끝났다. 심상무는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 과장은 방패로서 이미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다른 탑승자들에 비해 운전자의 생존율이 높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충돌할 준비와 긴장을 몸이 하기 때문이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사람은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리고 그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잘 견뎌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