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떤 연말 - 2
김 과장은 이런 상황이 이제는 다소 즐겁다. 직원들이 고마워해서도, 잔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해서도, 심상무에게 미운 감정이 있어서도 아니다. 심지어 본인도 이 감정의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사회 초년생 때 들었던 잔소리들과 지금 듣는 잔소리를 비교했을 때, 어쩐지 지금의 상황은 불편함이 훨씬 덜하다. 정말 방패 가 되었나 보다. 시계를 잠깐 쳐다본다. 아홉 시 10분 전. 심상무는 보통 9시 5분 전에 출근한다. 가끔 사람들의 출근시간을 보고 있으면 기가 막힐 정도로 규칙적인 경우가 있다. 심한 경우는 한 달에 하루이틀을 제외하고는 거의 30초 오차범위 내로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도 있다. 직원들의 근태를 가끔 들여다보는 김 과장은 이런 직원들의 출근 패턴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연히 시계를 그때 보았다면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세는 버릇이 있다. 그중 가장 높은 확률로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심상무이다. 오늘도 8시 55분 20초쯤 마음속으로 10초 카운트를 시작한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심상무의 출근부에 도장이 찍힌다.
심상무는 바로 자리로 들어오지 않는다. 탕비실에서 커피믹스를 타서 자리로 가져온다. 자리엔 지금은 쓰지 않는 재떨이가 있다. 그 재떨이는 이제 믹스커피를 위한 컵받이가 되었다. 오랜만에 커피를 들고 들어오는 심상무에게 직원들이 환영 인사를 한다. 평소처럼 밝게 인사를 주고받은 듯 하지만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심상무는 일어서서 인사하는 김 과장 앞에서 살짝 굳은 표정으로 김 과장을 한번 쳐다본다. 좋은 신호다. 김 과장은 심상무를 잘 알고 있다. 저 살짝 굳은 표정을 읽는데 5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심상무가 자리를 세팅하는 동안 간단한 보고 자료를 하나 출력한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가져가는 편이 자연스럽다. 이제 김 과장은 알고 있다. 보통의 경우 잔소리는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좋은 경험이 아니다. 오자마자 스트레스를 받을 심상무를 위해 간단한 자료설명으로 상대의 긴장감을 풀어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해야 할 말을 하도록 유도한다. 이러는 편이 그냥 다짜고짜 맞으러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김 과장이 한 손에 서류를 들고일어난다. 지대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분주히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러면서 한쪽 귀를 열어놓고 있다. 김 과장이 들어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몇 걸음 되지 않는 발걸음 수를 센다. 저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라 자신들의 오늘 칼퇴근 여부가 달려있다. 이제 걷게 될 김 과장의 대여섯 걸음은 재무 1팀의 지난 칼퇴를 용서받고 오늘의 칼퇴를 약속할 중대한 발걸음인 것이다. 오늘 저녁 약속 여부는 순전히 지금 두 상관의 대화내용에 달려있다. 대화가 시작된다. 지대리는 기계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귀를 쫑긋 세운다.
웬일로 둘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대고 있다. 평소 톤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다. 그리고 대화가 길어진다. 이건 안 좋은 신호다. 지대리는 김 과장 스타일을 알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길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 스몰톡을 자신의 생활신조라 공언하고 다닐 정도로 장황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야근이 잦은 김 과장은 대화를 짧게 만들 수 있는 가불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긴 대화라니? 내용이 궁금하다. 사람들 중에는 두 가지 이상을 동시에 생각하며 일할 때 능률이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대리가 바로 그런 케이스다. 한 가지에 몰두하며 일할 때도 물론 잘 해내지만 일하며 다른 생각에 빠져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더 빠르고 능숙하게 해내는 능력이 있다. 가벽 건너편 대화를 궁금해하고 있자니 어느새 아침 루틴이 끝나버렸다.
약 30분 후 김 과장이 자리로 돌아왔다. 지대리는 빤히 쳐다본다. 궁금하단 말을 얼굴로 하는 것이다. 김 과장은 싱긋 웃음으로 대신한다. 모든 게 기우였다. 행복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겠다. 오늘 저녁은 친구랑 여의도에서 쌀국수다. 그렇지만 왜 굳이 소곤대며 말했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다만 대부분의 궁금증이 그렇듯 캐내어 나에게 좋을 게 없다고 생각되면 캐묻고 싶은 생각은 별로 안 하게 된다. 인간이 굳이 알 필요 없는데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진화한 결과일까? 아니면 괜히 캐물었다가 지금의 만족감이 감소할까 두려워 질문을 피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김 과장은 조금 피곤해 보인다. 잠시 바람 쐬러 나가려다 어떤 기운을 느낀다. 지금 나가면 누군가 뒤따라 올 것을 직감한다. 대화를 궁금해했을 누군가가 틀림없다. 평소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밀착취재를 하는 지대리의 습성을 이미 잘 아는 것이다. 이럴 땐 팀원들이랑 사이가 좋은 게 역으로 작용한다. 팀장이란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김 과장은 그냥 자리에서 커피타임을 갖기로 한다. 그리고 숨 한번 돌리고 다시 일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