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연말 - 3
오전 11시, 다들 오전 막판 스퍼트를 올릴 시간이다. 그때 심상무가 외투를 입고 잠시 밖을 나선다. 당뇨가 있는 심상무는 회사 산책로를 수시로 돈다. 보통 걸음으로 10분 이내로 끝나는 적당한 거리이다.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씨가 심상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산책로 중간중간에 감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약 10년쯤 전에 심었던 감나무들은 이제 회사의 마스코트다. 50대 이상 모든 임직원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감나무들은 이 삭막한 환경에서도 매년 각각 수십 개의 감을 생산해 낸다. 감나무에서 잘 익은 감은 모두의 오락거리이다. 그리고 감나무에서 감을 잘 수확하는 것이 임원들의 기본 덕목 중 하나이다. 간혹 덜 익은 감을 따거나 따다가 떨어뜨려서 못 먹게 되었을 때는 대표님의 질책을 피할 수 없다. 감나무를 바라보는 심상무를 창문으로 내려다보며 최주임은 생각한다. 왜 어르신들은 감나무에 열광하는 걸까? 감은 마트에서 사 먹으면 그만이다. 또 이런 도시에서 자란 감은 그다지 맛이 좋지 않을 것 같다. 먹고 나면 남은 쓰레기 처리도 곤란하다. 그뿐 아니라 손과 얼굴에 칠갑을 하고 먹어야 하는 것도 별로다. 어렴풋이 옛 어려운 시절의 추억으로 먹는 게 아닐까 아마 최주임이 진심으로 이해하기는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인 듯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평온한 오후가 지나간다. 지대리를 포함한 사무실의 직원들은 조금 들뜬 분위기이다. 연말에 칼퇴근은 흔치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기는 이르다. 혹시나 대표님이라도 들어오는 날에는 모두 허사가 될 수 있다. 지대리는 창밖을 내려다본다. 창밖에는 불과 한 시간 전과 다르게 사람들이 북적인다. 5시 퇴근한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사이사이로 우뚝 서있는 빌딩들은 노을빛에 반사되어 장관을 이룬다. 태양이 퇴근 전에 마지막으로 그려내는 '황혼의 도시'라는 이름의 풍경화다. 그리고 좋든 싫든 이 도시의 구성원이라면 모두 이 그림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일관되게 아름다운 그림이 매일매일 균일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이 노을빛으로 빛나는 빌딩들 안에는 아직 퇴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창밖의 풍경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창밖의 사람들은 6시에 퇴근하는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곧 해가 완전히 지면 각각의 빌딩들은 노을아래 숨겨왔던 자신들 각자의 색으로 빛난다. 해가 완전히 지면 변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각각의 색으로 빛나는 빌딩들보다 더 다양하게 빛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들 역시 빌딩 속에서는 조용히 숨겨왔던 자기들의 색을 되찾아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한다. 그러면 비로소 완전한 연말 도시의 풍경이 된다. 한 시간 전보다 몇 배는 더 북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리는 이제 수월하게 걷기도 힘들 정도다. 하지만 이 붐비는 거리는 붐비는 거리를 만든 모든 이이게 활력을 준다. 아무리 빌딩 내에서 한적한 공간에서 멋진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북적이는 이 거리에서 자기 자신이 누군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6시 퇴근을 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기다려준 5시 퇴근자들에게 감사함을 느낄 기회를 얻는다. 퇴근이란 그런 것이다. 이처럼 5시 퇴근과 6시 퇴근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6시가 되었다. 지대리는 쏜살같이 자신을 기다려준 5시 퇴근자를 만나러 간다.
곧 사무실은 거리가 붐비는 만큼 반대로 한산해지고 만다. 그리고 탕비실에 숨어있던 한 사람이 자리로 돌아온다. 야근을 각오했던 김 과장이다. 팀원 전체에 연말의 자유를 선물한 그는 흐뭇하게 자기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야근을 시작한다. 이 모습을 심상무가 본다면 한숨을 지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스스로 결정했다면 무엇이든 즐겁게 할 수 있다.
정말로 사람들의 행복은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생긴 것이다.
이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다 함께 행복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는 정말 감사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