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퇴근

ep4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7

by 밀크씨슬

차라리 자기네 업체가 사용하는 원자재의 품질이 더 좋다는 변명이 나았을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원자재의 목록과 각각의 등급표를 받는다. 그리고 더 저렴한 업체에 전화를 해서 똑같이 자료를 받은 후 계약한 업체가 더 좋은 등급의 자재를 쓴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된다. 그리고 원자재의 종류는 아주 많다. 그 중에 핵심 자재중 하나라도 기존업체가 더 높은 등급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만 선별해 보고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게 해결된다. 그리고 이 생각이 김과장이 통화를 하는 와중에 떠오른 기적적인 신의 한수 였다.


김과장은 상대 업체를 설득한다. 그리고 원자재 등급표를 얻어낸다. 그리고 한마디만 유도심문하여 듣는다. '여기 자재는 좋은거 쓰는거 맞지요?' 이 질문에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 역사상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저렴이 업체에게도 자료를 받았다. 다행히 예상대로 흘러간다. 단열재의 등급이 미세하게 더 좋다. 기존업체에 묻자 그 제품이 방음 효과가 뛰어나다는 둥 신이나서 떠들어댄다.


김과장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적는다. 모든 통화내역을 녹음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실 검색으로 알아낸 사실이지만 두 자재는 들어가는 총량 기준으로 3만원도 차이나지 않는다. 하지만 두 업체의 총 견적 금액 차이는 20만원이다. 이 사실은 김과장만의 비밀이다.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다. 대표이사 집무실에 들어간다. 대표는 잠시 졸았는지 눈이 졸립다. 보아하니 자기가 시킨 것이 무엇인지 잠시 까먹은 모양이다. 다이아몬드 김과장은 이정도에 긁히지 않는다. 다행히 잘 끝났다. 원자재표 옵션은 보여줄 것도 없었다. 업체들 견적리스트를 보더니 사장은 더 저렴한 곳을 보고 여기로 고르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김과장은 해당업체와 통화하였으며, 이 공사에 어떤 원자재가 들어가는지 10가지 정도 나열한 뒤 그 중 어떤 원자재의 품질이 차이가 현저했다.'라고 군더더기 없이 설명한다. 이 한번의 깔끔한 설명이 사장의 변덕을 주눅들게 했다. 더 이상의 심문은 없었다.


대표는 지는 것을 싫어한다. 더 이상 추궁했다가 결론이 같다면 괜히 늦은시간에 직원을 붙잡고 괴롭히는 이미지가 될까 우려되는 타이밍이다. 20만원 더 저렴한 곳을 찾자고 직원을 괴롭히는 대표가 되기는 싫었다.


퇴근이다. 현재 시각은 10시 30분. 배는 고프지 않다. 물론 약속은 파토가 났다. 그런데 생각보다 약속 상대는 별로 화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미안해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상대는 사실 몸이 안좋아서 오늘 파토내고 싶었다고도 말한다. 김과장은 상대의 배려심이 담긴 거짓말에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감정이 밀려왔다. 거짓말도 이런 배려심을 담았을 때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게 모르게 도와주고 있다고 느낀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기에 김과장은 언제나 미소를 짓는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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