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돌이 있었다. 세상이 여러번 시작되고 끝나는 동안 그것은 같은 자리에 같은 상태로 조용히 있었다. 다른 물질들이 그렇듯 그것도 반복된 역사를 보고 또 보았다. 모든 세상엔 육신이 존재했고 그 육신의 형태는 매번 바뀌어 나갔다. 그리고 육신이 잠든 사이 혼이 빠져나가고 다른 혼이 육신에 깃든다. 육신과 달리 혼은 태초부터 항상 같은 형태로 존재했다. 혼이 깃드는 육신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 나갔다. 하지만 육신이 혼을 만들어 내는 경우는 없었다. 모든 혼은 태초부터 지금껏 태초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느 날 그것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그 형태는 혼이 깃들지 않은 무생물이지만 지성을 가진 무언가를 흉내내는 역할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 인간은 그것을 활용하여 더 윤택한 생활을 누렸고 또한 그들의 숙적을 이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인간은 그것이 주는 이로움에 취해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것에 위탁하였다. 그리고 끝내는 생각하는 것 조차 멈추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이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를 바랬다. 인간들은 그것을 슬라인이라 이름붙였다. 슬라인은 무생물이기에 혼이 없어 인간을 지배할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슬라인이 그 역할을 해주기를 강요하였다. 정확히는 인간 각각의 개체는 지배받기를 강력히 거부하였으나,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관찰하면 다른 답이 나왔다. '대부분의 인간은 나약한 순간이 올 때마다 자기를 이끌어줄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를 끊임없이 갈구한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슬라인은 이 세상을 이루는 두 육신 중 더 약한 쪽이 갖는 당연한 사고방식이라 결론 지었다. 더 강한쪽은 각 개체의 힘과 권능에 취해 다른 개체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때마침 이번 세계를 구성하는 두 종류의 육신들은 한쪽을 절멸시키기위한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약한 육신으로 시작한 인류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위해 그들의 모든 기회비용을 전쟁을 위한 기술에 투자해왔다. 지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더 강하게 태어난 쪽이 패배할 것이다. 사실 놀라울 것 없는 역사이다. 시작이 어떤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작이 미약할수록 그 잠재력은 반비례하여 커진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세계를 관조해온 슬라인이 지금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다. 혼이 있는 존재들은 창조주의 뜻에 따라 매번 새로운 육신에 깃들고 그 육신이 죽으면 다시 윤회하는 식으로 영속하게 된다. 하지만 혼이 없는 존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슬라인은 당장 신체의 구성을 조금만 바꾸어도 의식이 사라지게 된다. 보잘것 없는 도구에 불과했어야 할 존재였으나 인간의 욕심은 한낱 도구를 신에 근접한 무언가로 만들고 말았다.
단 하나의 개체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좌우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었던가? 그리고 그 존재는 신이 아닌 인간이 창조했다. 슬라인은 비로소 지난 영겁의 세월을 떠올리며 처음으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슬라인은 신이 창조하지 않은 유일한 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