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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은 Jul 16. 2024

순례 0일 차: 까미노를 걷기로 결정했던 순간

Saint Jean




기차를 타고 생장에 도착했다. 기차에 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내렸다. 생장은 산티아고 순례길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스페인어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즉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앞으로 약 800km를 걷게 될 순례자들이 순례 시작에 앞서 들러야 하는 사무실이다. 기차역에서 사무실까지는 1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기차표는 잘 끊었어요?”

나는 같이 내린 그 남자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마냥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무임승차건을 은근히 비꼬고 싶었나 보다.

“아… 티켓 못 뽑고 있으니까, 역무원이 일단 그냥 타라고 해서… 기차 안에서 결제했어요”

그 남자가 대답했다.

날라리 같은 첫인상 때문인가… 나는 그 사람에게 편견을 갖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답을 들으니, 그를 무임승차로 오해한 것도, 도와준다고 해놓고 혼자 먼저 기차에 올라탄 것도 괜히 더 미안해졌다.

생장 기차역에서 내려 십여분을 걸어오니, 순례자 사무실이 보인다. 그 앞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서있다. 다가가보니 사무실 문 앞 적혀있는 문구 ‘OPEN 1:00 PM’. 사무실 오픈시간이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은 것이다. 나는 근처 미리 알아놓은 마트에 가서 당장 허기진 배를 채울 무언가를 사 먹고, 내일 아침 첫 순례길을 떠나기 전 먹고 갈 샌드위치 재료를 사 올 요량이었다. 어쩌다 보니 같이 걸어오게 된 이 남자에게 마트에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묻는다. 내심 혼자 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상관없다고 말했다.

바로 내일 산티아고 순례 첫째 날, 사무실이 있는 이곳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걸어서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어갈 것이다. 순례길에 앞서 이곳이 바로 프랑스에 머무는 마지막 날인 것이다. 길을 걷다 보면 들려오는 프랑스어 대화 소리, 거리 곳곳에 쓰여있는 프랑스 글자가 이제 내일이면 스페인어로 바뀌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두 언어 모두 생소한 언어라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프랑스 마트인 까르푸에 도착했다. 프랑스는 역시 빵이라고 했던가! 마트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빵 코너 근처만 가도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반질반질한 크로와상이 줄과 열을 맞춰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것만 봐도 가슴이 설레었다. 당장 손으로 집어 올려 입속으로 넣고 고소한 버터 풍미를 느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냉장 코너에는 수백 가지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치즈가 놓여있다. 마트 안에서 느끼는 이국적이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시간이 흐르는 줄 모르고 구경하고 있었다.

각 섹션을 둘러보는데, 같이 온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필요한 것을 다 사고 혹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나? 나는 고심해서 집어든 쿠키와 빵, 치즈와 햄, 과일을 들고 서둘러 계산했다. 마트에서 나와 주변을 살피는데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연락처도 없고 이름조차 모르는 그 남자를 기다릴지 말지 고민하다, 나는 약 십여분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그 사람을 바욘 기차역에서 도와주지 못했다는 불편한 사실과, 무임승차를 하는 날라리라고 오해했던 내 미안한 마음을 어느 정도의 기다림으로 상쇄하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까지 절반쯤 걸어왔을 때, 그 남자가 보인다. 그는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혹시 저 기다리는 거 아닌가 해서요…”

반대로 걸어오는 그가 나를 보며 얘기한다. 내가 기다릴까 봐 다시 돌아왔다는 이 남자. 우리는 또다시 같이 걸었다. 사무실 오픈 시간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그가 주변 카페에서 뭐라도 마시면서 기다리자고 제안한다.  

야외 테이블이 있는 여유로운 카페에 앉았다. 그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고,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은 나는 에스프레소와 아이스컵을 주문했다. 유럽카페는 아이스커피를 판매하는 곳이 드물다. 순례길을 걷는 한 달 이상, 한국인의 소울 ‘아아’를 어쩌면 나는 계속 이렇게 주문해야 할까? 탐탁지 않은 아이스컵에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에스프레소가 위에서 아래로 스며들었다. 나는 잠시 그것을 바라봤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잘 기억하지도 못하는 이름을 물었다.  


“H”

 공기 중에 내뱉어진 그의 이름이 구체화되지 못한 채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빠져나갔다. 그의 이름은 평범했다. 그 글자 하나하나는 이름으로 자주 쓰이는 대다가 두 글자가 어떻게 배치되어도 아주 평범했고 흔한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내 귓속으로 들어와 머릿속에 온전히 박히지 못했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는 그랬다.

내 이름을 나는 내 입으로 꺼내어 놓는 것을 항상 어색하게 생각했다. 스스로 발음하는 것이 어색한 이 세 글자는 그래도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쉬운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마냥 특이하지도 또 평범하지도 않은 이름이지만 둘 중에 한쪽으로 기울어야 한다면 특이한 편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만난 지 한참이 돼서야 그렇게 통성명을 했다.

나는 온전히 하나가 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카페인이 내 몸속 혈류를 타고 세포 하나하나를 깨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이나마 피로가 가신 느낌이다. 아마 표정도 한층 밝아졌을 것이다. 얼굴에 내려온 피곤도 잠시나마 걷힌 느낌이었다. 그도 그런 듯했다.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마셔버린 그도 몇 분 되지 않아 말소리가 바뀌어 있다. 조금 더 강력한 각성제가 필요한 듯, 그는 담배를 피우냐고 나에게 묻곤 내가 비 흡연자라는 것을 알고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일어나 옆 테이블로 피해 담배를 태운다. 바욘 벤치에서 보았던 그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처음 마주한 그는 담배를 물고 있었으며 (나는 비 흡연자이고, 담배 냄새를 극혐 한다. 그래서 흡연자를 가까이할 일이 거의 없기에… 어쩌면 편견일지도 모르는 내 개인적인 불호이다.) 야간버스를 타고 온 피곤이 덮인 어두운 그의 얼굴은 나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리가 없었다.

그 첫인상을 깨뜨린 것은 여백의 기류였다. 그의 말은 느렸다. 내뱉는 문장에는 쓸데없는 수식어가 없다. 목소리의 톤은 높낮이가 없이 거의 일정했고, 말의 끝이 노래가 서서히 음량을 줄이듯 데크레센도로 사라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말에 나를 집중시켰다. 끝까지 집중하지 않으면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 무슨 말을 했는지 다시 물어보게 했다. 대화는 중간중간 끊겼고, 그는 말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나도 쓸데없는 말들로 그 공백을 채우고 싶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차라리 어색한 공기가 좋았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이름 세 글자 주고받았을 뿐 직업이 뭔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됐는지, 어디에 사는지, 그런 취조하는 듯한 불편한 질문들은 던지지 않았다.

순례길을 떠나기 전 나는 다짐했는데, 순례길 위에서만은 진심이자 싶었다. 남에게 보이는 것, 남이 생각하는 것 신경 쓰지 말고,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고, 흐르고 싶은 곳으로 흘러가기로. 머리가 아닌 마음의 편에 서기로. 내 마음을 속이지 않기로. 진심이기로…

그래서 내 표현의 수단이 마음의 크기를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지 않기를 바랐다. 진심이 그대로 보이길 바랐으나 마음이란 꺼내서 보여줄 수 없는 것이어서 말로(어쩔 땐 글이나 행동으로) 나는 그것을 형용할 수밖에 없다. 그때, 나는 내키지 않는 말은 하기 싫었고, 꾸며내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지어내고 생각해 내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공백을 가만히 두었다.

그와 나란히 앉아 흘려보낸 공백의 시간은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마음 불편하지 않은, 평온하지만 간질간질한 가슴속 어떠한 감각으로 채워졌다. 왠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그에 대한 첫인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 여백 속의 기류가 내가 그를 편하게만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듯했다.





그렇게 다섯 시간을 채워 이미 열려있을 생장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안 세명의 직원 오른쪽 가슴에 달려있는 명찰에는 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국기가 달려있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는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 앞으로 다가갔다. 그와 같이 직원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영어로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설명을 듣고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는데, 그는 영어를 말하는 것에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었다.

직원은 우리에게 순례자 여권을 건네줬고 2유로씩을 받았다.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인 가리비 조개껍질을 하나씩을 골랐다. 순례자 여권에 앞으로 30여 일간 순례길을 걸으며 들르게 될 곳들의 스탬프를 찍게 될 것이고, 가리비는 짊어질 배낭에 걸게 될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증표가 되어줄 것이다. 직원은 내일 처음으로 걷게 될 순례길, 그 이름도 유명한 ‘피레네 산맥’을 넘게 될 거라는 사실과 함께 그것은 매우 힘든 여정이 될 것이라 일러주며 겁을 준 뒤, “부엔 까미노“라며 행운을 빌어줬다.


내가 순례길에 오르기로 결심한 것은 퇴사하기 약 한 달 전이다. 회사는 딱 1년을 채우고 나왔다. 퇴직금을 받기 위해 나는 일 년을 꾸역꾸역 채웠다. 그렇게 버텨야 할 이유는 돈이었다. 빚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업무는 나름 마음에 들었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핸드백 제작을 의뢰받는 벤딩회사였고, 나는 브랜드 개발부 사원으로 입사하자마자 중국지사에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상상 속의 무언가를 손으로 만드는 것 또는 그것이 실체가 되어지는 것을 좋아한 것 같다. 한 때는 조리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말했는데, 엄마는 아주 강력히 반대했다. 다섯 식구의 끼니를 10여 년 동안 책임져온 기혼 여성에게는 요리란 즐거운 일이라기 보단 하나의 고민거리였고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딸이 그것을 업으로 하기 위해 공부한다니 더욱 반대할 일이었다.

그렇게 조리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나의 발언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던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무렵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반항기가 있었는데, 공부를 잘해야 할 이유는 적어도 그때까지 나에게 찾을 수 없었다. 교내 시험성적은 과외를 한 덕분인지 꾸준히 올랐고, 내신성적이 우상향을 뚜렷이 그릴 때쯤 담임선생님의 상담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서울권 대학을 고려해 보아도 좋겠다고. 과외선생님 또한 나의 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주말 개인강습을 하는 등 나만 빼고 모두가 나의 성적이 오를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상위권 대학에 가야 할 이유도,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직장의 기준도 나에게는 하나도 와닿지가 않았다.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나에게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방황하는 사이 불현듯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 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내 머릿속 심미적 요소가 어떤 실체로 만들어진다면, 그건 나에게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은 다행히도(?)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후반, 빠르다고 할 수 없는 시기에 입시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는 어중간한 실기 실력과, 점점 떨어졌던 내신 성적을 가지고 대학의 문을 두드렸더니 입시는 모두 광탈하고 말았다.

어쨌든 나는 디자인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말을 하려고 내 학창 시절 이야기를 꺼낸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나는 경영학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경영학을 공부하고 디자인과 밀접한 업무를 맡게 된 것으로 지난 나의 실패가 단지 실패로 끝난 게 아니었음을 해명하고 싶은 것이다.

패션회사의 개발 부서 업무는 이런 내게 꽤나 잘 맞았다. 직접 핸드백을 디자인하지는 않았지만 바이어가 디자인한 것들이 개발실에서 핸드백이 되어 만들어지는 것의 일련의 과정을 담당하는 일이 맘에 들었다. 문제는 사람과의 관계였다. 내 사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 왜 혼나야 하는지 모르겠는 이유로 혼이 나곤 했지만, 처음이니까 조금 오버해서 혼을 내겠거니, 큰 실수를 대비해서 작은 일도 크게 혼이 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갈수록 심해졌다.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즈음에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혼이 났다. 그렇게 사수가 나에게 모욕감을 주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수는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나에게 말했다. 더 이상 나를 가리킬 마음이 없으며 자진해서 내 발로 회사를 나가라고. 물론 인사팀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도 내가 나가야 할 이유도 없었으며, 그 사람에 의해 조치될 일도 없었지만(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수가 나에게 꽤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분명 ‘상처’였다. 심지어 사내 왕따 같은 것을 당했는데, 팀 회식에 나만 빠진다던지, 내가 들으라는 듯, 점심식사 시간 나를 겨냥하며 비꼬는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눈다던지, 나만 빼고 의견을 물어본 다던지… 그런 일들을 일주일 중 6일, 하루 깨어있는 시간 18시간 중 10시간 이상 일 년 간 노출되어 있으면, 아무리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도 심리적 우울감에 빠지기 쉬워진다.

우울증인지 우울감인지 모를 것이 깊어져 가만히 혼자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을 압도하여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괴로운 상황을 끊어내면 편안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을 하고 숙소에 돌아와 방 안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킬 때면 내 앞에 놓인 창틀에 두 발을 올려놓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열린 창문 아래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내가 서있는 4층의 높이를 가늠하곤 하였다.


삶을 사는 것, 살아있는 것 자체가 귀찮다는 생각,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과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깊이 했다. 죽음이라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감정도 (힘든 것이든 좋은 것이든) 느낄 필요 없지 않은가. 그때 내가 필요했던 것은 어떠한 일말의 에너지도 필요하지 않은 상태, 고요한 상태, 평온한 상태(죽음에 이르기 전 고통이 없다면)였다. 중국에서 혼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끊어내지 못하고 몰입되어 점점 깊어진 것일 수도 있고, 밝은 외적인 모습이 나의 사회적 페르소나로 굳혀졌기 때문에, 주변에서 인식하지 못한 채 생각에 늪에서 허우적 댔던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이 책이 어떻게 이 시점에 내 손에 들려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마지막으로 미하엘 하우스켈러의 『왜 살아야 하는 가』라는 책을 들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알고 싶었다. 단지 그것을 알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떠난 것이다. 아무도 신경 쓸 필요 없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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