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같이 보고 있던 토요일 늦은 밤, 아빠는 방구석에서 잘 묶인 검은 비닐봉지를 가져와서 무심한 듯 내 앞에 툭 던져 놓았다. "이게 뭐예요?" "풀어 봐. 네 거야."
올해 1월 아빠는 암 판정을 받았다. 당장 수술이 어려워 항암 치료를 먼저 받기로 했는데 한 달 전만 해도 건강하게 일을 하셨기에 가족들은 크게 놀랐다. 물론 아빠가 가장 많이 놀라셨을 것이다. 항암 치료를 시작하기 전 주말마다 나는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에 내려가서 머무는 중이었다.
봉지를 풀어보니 플라스틱이나 벨벳 천으로 된 크고 작은 여러 상자들이 들어있었다. 상자에는 각기 다양한 금은방의 이름들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상자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나는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안 순간 눈물이 솟구쳤다. 주무시고 계시던 엄마도 어느새 다가오셨다.
비밀의 방 문을 열 듯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엄마 아빠의 순금 목걸이, 반지, 넥타이핀 등이 추억처럼 반짝이며 하나씩 튀어나왔다. "이 반지는 동네에서 반지 계 할 때 받았던 것, 이건 아빠가 이장(里長) 하고 받은 넥타이핀, 이건 네가 시집가기 전에 해 준 목걸이......" 하나하나 설명하시는데 그 순간 엄마의 눈빛도 추억 속 보석처럼 반짝였다.
분홍 상자에 들어있는 쌍가락지는 엄마의 결혼반지라고 했다. 나는 평생 농사일을 해 온 엄마의 손가락에 반지 낀 모습을 좀처럼 본 기억이 없다. 내가 껴보니 신기하게도 약지에 딱 들어맞았다. "네가 끼면 되겠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결혼하고 엄마가 거의 끼고 다니지 못했을 반지가 내 손가락에 꼭 맞는다는 것이, 그렇게 딸에게 전해진다는 것이 이상하게 더 슬펐다. "다 갖고 가서 팔아서 써. 빚도 갚고. 모두 서른 돈 정도 될 거야. 아니다. 우리가 팔아 줄게. 네가 팔면 제값도 못 받고 속을 수도 있어." 엄마에게는 나이 든 딸이라도 아직도 ‘끼’ 없는 미덥지 못한 딸이었다.
결혼반지는 엄마 말처럼 끼고 다니지는 않더라도 내가 간직하기로 했다. 그다음 주말 내려가니 엄마는 금을 다 팔았다며 오만 원 권 현금 두 다발을 주셨다. 항암 치료가 시작되면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정리할 건 해야지 하셨을 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져 자꾸만 눈물이 났다.
이어령 교수는 마지막 노트 <눈물 한 방울>에서 "그 사람을 위해 돈을 써보면 안다. 그 돈이 아깝지 않다는 건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액수가 큰 만큼 사랑도 크다. 그 돈이 아깝지 않다면 '사랑한다'는 숫자인 게다"라고 했다. 부모님이 아깝지 않게 그냥 나에게 내밀어 주신 검은 비닐봉지. 긴 시간 동안 어두운 그곳에서 빛이 바래지 않고 반짝이던 금. 차마 표현하지 않고 감춰두었던 부모님의 큰 사랑은 이제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