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종교가 없다. 그 중 결정적인 이유는 선택과 결정, 결과와 책임이라는 과정을 온전히 내가 해내기 때문에 절대자보다는 스스로를 믿어야 하는 게 맞지 않냐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간혹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올 때면 두 손을 모으고 온 마음을 담아 기도하고는 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
그런 내가 요즘 들어 기도 자세를 자주 취하고 있다. 종교가 생겼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회사에서 실수하고 자책하고 있을 때, 컨디션이 안 좋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했을 때, 불편한 감정을 처리하고 있지 못할 때, 판단력이 흐려져 있을 때마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나를 잃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마음속으로 내뱉는다. 청자는 초자연적인 대상이 아니라 나니깐 결국 기도는 아니고 자기 암시라고 보는 게 맞겠다.
과거에 자기 암시를 하는 방법들을 시도해 봤지만 잘 통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치거나 이루고 싶은 바를 적어서 눈에 보이는 곳에 둔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민망함을 이겨내고 해 봐도 거부감만 드는 부담스러운 행위라 효과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기도의 형식을 빌리니 자연스럽고 효과도 있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면 요구가 아니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신은 아닐지라도 정중한 자세로 부탁하듯이 말하니 거부감이 줄어들고 하는 말에 귀 기울이게 된다.
최근에는 고민거리가 자잘하고 신경질적으로 되면서 일상이 이 정도로 영향을 받아야 하나 싶은 순간이 많았다. 큰 문제는 없고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현재가 아니라면 과거인가 싶어서 골몰해 보면 답을 찾기도 전에 몸과 마음만 너덜너덜해지기만 했다. 현실을 잊기 위해서 관계에 집착하고, 유튜브에 매달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에 사로잡혀 편협하고 부정적인 생각만 할 수 있는 상태에 다다랐다. 그러다 문득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란 무엇인지 콕 집어서 정의할 수 없지만 이 문장만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속으로 간절히 되뇌던 주문과도 같은 염원은 서서히 힘을 얻었고 간절함이 더해지면 나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샌가 두 손을 모으고 입으로 작게 읊조리게 되었다.
“나를 잃지 않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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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불이 꺼진 침실에 앉아 처리되지 못한 감정과 생각들로 여전히 괴로워하고 만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해서 점점 조급해진다.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다가 그조차 부질없어지면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현실적인 문제를 떠올린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편하지만 잘못된 길과 수고롭지만 가야 하는 길 중에서 항상 고민하고 만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끝끝내 눈을 감고 깍지 낀 손을 이마에 가져대고는 이내 침묵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