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ingonthewall Apr 14. 2024

캐치-22 : 자신을 정의내리는 일의 역설

현대 자유주의, 다원주의가 처한 '필연적' 곤경

위험한 임무로의 출격을 면제 받으려는 군인은 자신이 정신 이상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가 정신 이상임을 입증할 수 있는 자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메타적으로 인지할 수 있고 위험한 임무로의 출격을 기피함으로써 자기의 안위를 돌볼 수 있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셈인데, 이는 그가 미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미친 사람일 수 없고 위험한 임무로의 출격을 피할 수 없다.



조지프 헬러의 소설 <캐치-22>에서 묘사되는 이와 같은 역설은 오늘날 보편 다수에게 있어 의식할 수도 없이 당연시되는 정식화된 자유주의, 다원주의가 처한 모순과 동일한 형식을 공유한다. 즉, 어떤 사회적 계율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은 그를 사로잡은 자유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때 자유는 단지 스스로의 욕망에 순종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해방의 약속은 그러한 비전을 함양한 자가 규정으로의 속박을 의미한다. 그는 '자유롭게' 욕망하고 그것을 따라서 행위하지만, 오롯이 자신에게서 창발되었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욕망의 기제를 의식하고 이해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그가 느끼는 자기 통제의 감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를 통제하는 건 생각하는 스스로가 아닌, 그의 (카를 융이 '운명'이라 일컬은) 의식화되지 못한 무의식, 의식의 기저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최초의 충동일 따름이다.



자유로워야 한다는 강박 하에서, 무엇도 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에, 자유주의적 인간은 할 수 있는 무엇이든 실행에 옮기지만, 그럴 수록 그는 스스로의 무의식적 충동의 노예가 된다. 무의식의 자동적, 조건 반사적인 충동이 충족되면서 발생하는 거짓된 효용감은 인간을 충동의 맹목성에 골몰하게 한다. 그의 마음을 이끄는 것은 스스로가 주어진 사실의 본성에 관해 명확히 인식하고 고민한 끝에 이끌어낸 결단이 아닌,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향해 귀결하는지 파악할 수 없는 의식의 혼탁한 흐름이다. 오늘날 누구나 자아의 실현, 표현을 지상적인 목표로 삼는다. 스스로의 독자적인 고유성을 구현하는 (그렇게 생각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각자의 삶이 충만해질 수 있으며, 삶의 본질적인 맹목성(하이데거가 피투성Geworfenheit이라 부르는)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의미를 모색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처럼 결여된 자기 인식은 정작 그러한 과정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자기'의 의미를 여전히 모호한 것으로 남겨 놓는다. 즉, 일체의 추구가 지향하는 지점은 여전히 막연한 것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주지되다시피, 오늘날 소셜 미디어 서비스를 통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자기 전시'는 각자가 지닌 개성의 표현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지만, 실제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각자는 자기가 주재하는 의도하에 빚어낸 자아상이 아니라, 외부에서 투사된 기대를 통해 만들어진, '보여지기에 적합한' 각자의 외화된 형상에 불과하다.



자유주의적 인간은 그가 짓는 업karma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오로지 자유롭기 위해, 무엇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도 모르는채 해방과 일탈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의 자유는 그를 헤어나올 수 없는 파탄으로 몰고 간다. 가령, '자기 표현'을 위해 온 몸에 문신을 두른 사람은 흔히 그러한 외양을 기피하는 사회의 보편 다수와 분리되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떳떳이 보일 수 없는 '비대면 인생'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가식없는 솔직함, '팩트 폭력'을 빌미로 타인을 자신과 같은 별도의 심상을 지닌 주체로 의식하지 않고 충동적인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받아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가능성은 결국 자기를 돕고 지지해줄 수 있는 타인과의 긴밀한 연결의 수준에 비례하는데, 고립된 인간, 타인의 적극적인 조력을 구할 수 없는 인간은 오롯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한번 뿐인 인생을 어떤 주저함도 없이 즐기겠다는 각오, YOLO(You only live once)의 정신은 삶의 장기적인 비전에 있어서의 분별을 상실케 만들며, 즉효적인, 그러나 아무것도 남지 않는 쾌락에 모든 가용한 자원을 쏟아붓게 만든다. 때문에 YOLO는 자주 수습할 수 없는 경제적, 물질적 파멸에 귀결한다. 자유의 비용을 모두 탕진해버린 결과, YOLO하는 자는 YOLO하기 전보다 더없는 부자유에 가까워진다. 그는 원하는대로 산 끝에 원하지 않는 형태의 삶에로 도달한다.



NKVD의 장관으로서 스탈린 시대 소련의 악명 높은 대숙청을 주도했던 니콜라이 예조프는 그의 비대해진 정치적 입지를 경계한 스탈린에 의해 결국 그 자신도 숙청 대상이 된다. 증거없이 기소되어 강도 높은 고문을 받은 끝에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고 처형을 앞두게 된 예조프는 다른 동지들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사상범을 증거없이 기소하고 판결을 확정할 수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예조프 본인이 관철한 방침의 하나였으며, 예조프를 도울 수 있는 동지들은 모두 그의 손에 죽었거나 예조프에 의해 실각하여 그의 정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체주의 체제 논리의 비정한 대변자였던 예조프의 비극적인 말로에서 오늘날 개인적 자유의 신봉자들이 처한 곤경이 겹쳐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니콜라이 예조프가 자신이 수행했던 체제 기능에 의해 파멸을 맞이했듯이, 오늘날 자유로운 개인임을 자처하는 이들도 스스로가 수행하는 자가 규정에 의해 그 외부의 가능성을 상실한다.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은 그 자체가 표상된 결여로서, 미완의 것으로 가정된 실재에 대한 긴장을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즉, 욕망하는 주체는 자신이 욕망하던 대상이 자신의 것이 될때, 그것이 스스로가 원하던 '그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때까지 줄곧 자리하던 결핍의 감각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충족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충족되어야 할 결여는 결여된 부분없는 온전한 전체에 선행하여 상상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사실 그 대상을 선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지 못했기에 원할 수밖에 없는 결여의 상태를 선망한다는 것, 상상된 결여와 현실 사이의 '부재하는' 간극에서 만들어지는 환상을 의욕하는 일이다. 한편, 모든 욕망을 단순한 기술적 수행의 대상으로 다루는 자유주의의 비전은 이러한 긴장 자체를 세속화한다. 가능한 한 어떤 것도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고 가정되는 개인에게, 욕망은 결여로서가 아니라, 이행 가능한 대상 그 자체로 파악된다. 그 결과 욕망은 단지 불현듯 부상하는 그 자체에 의해서 맹목적으로 이행되는 것으로서의 허무한 가치 기반을 드러낸다. 현대의 자유로운 개인은 단지 그것을 원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왜인지도 모르는채, 한편으로는 그것에서 아무런 효용을 느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원할 따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석의 문제에 선행하는 인식의 문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