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전통춤은 플라멩코

말레이시아 전통의상은 레이스 양산에 버슬 드레스

by 은섬


고교시절 우연한 기회로 필리핀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대회(World Youth Day)에 참가하게 되었다.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World Jamborees)처럼 전 세계 젊은이들이 모여 벌이는 축제 중 하나다. 일정 중에 '각국 문화의 밤'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는데 매일 저녁 서너 개국 팀이 자국의 전통문화(노래, 춤, 낭송, 연극, 의상 등)를 다른 나라 친구들에게 소개를 하는 형식이다. 한국팀은 부채춤과 강강술래를 준비해서 그 자리에 모인 전 세계 친구들과 손을 잡고 빙빙 도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다른 나라의 전통문화는 어떨지 나는 매일 저녁 눈을 반짝이며 기대했었는데 필리핀 팀이 플라멩코를 추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이번 행사의 개최국으로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은 이목을 끌고 있는 상황에서 서양 드레스를 입고 플라멩코를 추다니... 그런데 필리핀뿐만이 아니었다.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서양 복식을 입고 등장해 폴카나 왈츠 같은 유럽의 춤을 추었다.


플라멩코_이미지 pixabay



어릴 적 좋아하는 세계지도를 이리저리 보면서 각 나라의 이해할 수 없는 지명에 비슷한 의문이 있었다. 아프리카 고유의 언어가 있음에도 왜 그들의 땅을 조지, 엘리자베스, 빅토리아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지, 남아메리카에 산(가톨릭 성인을 호칭하는 세인트 saint의 스페인식 표기)으로 시작되는 지명이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캄보디아에서 내 가이드를 맡았던 현지인의 이름이 왜 소피아였는지 조금은 의아했지만 그냥 지나쳤던 모든 일들에 대한 대답이 말레이시아 민속박물관에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독립할 틈 없이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400년이 넘은 시간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일본의 침략과 지배하에 있었다. 열강들은 이어달리기 경주의 배턴 터치(Baton touch)처럼 말레이시아의 주권을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넘겼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민속박물관에는 말레이시아의 전통의상을 서양 복식인 레이스 양산에 버슬 드레스로 소개하고 있다.

마리아나 제도 티니안에서도 그랬다. 티니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미국의 격전지였으며, 많은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어 비행장 건설 등 일본의 군사목적으로 희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여성들도 위안부로 이곳에 끌려왔다. 그녀들이 머물던 동굴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비녀가 나왔다고 한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러시아인, 주변 다른 동남아인들이 티니안에 끌려와 많은 고초를 겪었다. 미군의 압박에 패망을 직감한 일본군은 원주민들과 포로들, 징용자들을 학살했는데 원주민들을 동굴에 모아놓고 막았던 물을 터트려 수장시켰고, 포로와 징용자들은 절벽에서 만세를 부르며 뛰어내리게 했다. 자살을 당한 것이다. 티니안에 살고 있는 '송송'가(家) 사람들이 있는데 본인들은 우리나라 손 씨 성의 후손이라고 했다. 그들이 소개해 준 다른 원주민의 집을 방문했는데 기념품처럼 일장기가 있어 내 눈을 의심했다. 거실 중앙 벽에 일장기를 걸어놓고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가 일본에 의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나에게 말해주는 그 순간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라오스에서는 영국인 친구의 한마디에 생각이 많이 복잡했다.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에서 꽤나 괜찮은 성급의 호텔이었는데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물이 끊겼다. 머리에는 거품이 잔뜩이었다. 프런트 전화도 불통이다. 너무 놀라 수건으로 몸을 둘둘 말고 호텔 방문 밖으로 빼꼼 나갔는데 옆방 영국인 친구가 거품 퐁퐁 내 몰골을 보고는 나의 곤란한 사정을 대신해 상황을 알아봐 주었다. 라오스의 상하수도 시설이 좋지 않아 예고 없이 종종 단수가 된다고. 난처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프랑스 놈들이 지배했던 나라라 상하수도가 안 좋은 거라고(그 말속에는 영국이 지배했던 나라들은 안 그렇다는 자부심이 포함되어 있었을까?) 그가 회심의 농담을 날리며 호텔 측에서 얻어 온 생수 몇 병을 건넨다. 나는 생수로 대충 거품을 헹구었다. 밤 새 물이 안 나왔다. 그리고 나도 밤 새 잠을 뒤척였다. 나는 아직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역사를 농담으로 주고받기엔 생각이 복잡하고 속이 쓰리다.




잊지 못할 중학교 담임이 있다. 교과는 수학이다. 그는 우리에게 일본 수탈의 역사에 감사하라고 자주 말했다. 일본이 철도를 놓아줬고, 산업화의 초석을 깔았고, 게으르고 무지한 조선인을 깨우쳐 주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다른 선생님 이름은 기억 못 해도 그의 이름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지를 배불리 먹이는 건 살찌워 잡아먹기 위한 것이다. 일본이 철도를 놓고, 산업화의 초석을 깔고, 조선인을 게으르고 무지하다고 한 건 최대치의 수탈을 저지르기 위함이지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티니안에는 한국인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 일본인 위령비는 여러 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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