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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Jun 11. 2022

그림, 고통을 기록하다

목숨의 가치_도레, 헤닝센


나는 그림을 볼 때 주인공들에게 말을 건네곤 하는데, 스타브 도레의  작품을 보고 적잖은 충격에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너무나 처참한 상황에 무기력해져 버려 어떠한 말도 그들에게 할 수 없었다. '곡예사'라는 제목의 이 그림 가족의 슬픈 서사다.


Gustave Doré_Les Saltimbanques (1874)


저 뒤로 줄이 걸려 있다. 아이는 줄을 타다 떨어졌다. 사고다. 왕관을 쓰고 금박 장식이 수놓아진 아름다운 푸른 드레스를 입고 고귀한 신분으로 분장한 어미, 빛나는 공연의상에 표정을 숨길 하얀 분칠을 한 아비. 무대 위에서 세상 화려하게 웃음을 선사하는 그들은 지금 울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이 순간 그들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가만히 안고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 없다.


아이와 아비가 같은 옷에 같은 분칠을 하고 줄을 타고 있는 동안, 어미는 뒤편에 대기하면서 트럼프 카드로 하루 운세를 점치고 있던 것 같다. 바닥에 부채꼴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카드 점괘는 아이의 사고를 예고했을까? 어미와 같은 장식을 하고 무대에 올라 함께 공연을 하는 개들도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아는 듯하다. 흰 개는 앞 발로 어미를 위로하고, 갈색 개는 어미 곁에 가지도 못하고 아비 뒤에 앉아 어떠한 위로도 건네지 못하고 있다. 불안과 슬픔이 가득한 개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준다. 그 뒤로 멀리서 지켜보는 동료들의 걱정이 더해진다. 이 비극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럽다.


아래 그림은 에릭 헤닝센의 작품으로, 일하는 도중 부상당한 노동자를 그린 그림이다. 희미하지만 뒤쪽으로 보이는 공사현장을 살펴보면 흙더미를 높게 쌓아 올려 가로로 긴 토목공사를 진행 중인 것이 도로나 다리를 건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규모 공사다.


Erik Ludwig Henningsen_En saaret arbejder (1895)


눈부신 산업화, 도시화는 결국 노동자들의 피와 땀, 그들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다. 기계의 부품처럼 소모되는 인간, 당시는 산업재해란 개념이 없던 시대다.(지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념은 있다. 하지만 예방과 보상에 있어서 노사정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는 추락을 했을까? 수레에 치었을까? 무너지는 자재가 그를 덮쳤을까? 머리에 붕대를 감고 들것에 옮겨지는 그는 눈을 감은 채 미동이 없다. 경찰까지 출동한 것을 보면 큰 사고였던 것 같다. 양복을 차려입고 있는 책임자로 보이는 이도 있다. 그를 들것으로 옮기는 동료 노동자와 몇 발짝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침울하다. 사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고, 누구나 언제든 이런 사고를 당할 수 있기에 그들은 동료의 부상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들것 옆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그녀. 배우자인 것 같다. 사고 소식을 듣고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달려왔을까?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녀는 몇일까? 아직 어린아이일까? 그는 회복할 수 있을까? 들것이 지나는 길 아래 끊어진 나무 울타리의 형상이 무덤의 십자가처럼 보인다. 목숨의 가치는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가? 화가들은 그림으로 우리에게 묻고 있다.



※  [도레] 그림 출처 : Art Forever (Arte para siempre)

※  [헤닝센] 그림 출처 : Una Mirada a los Pintores Nórdicos y del Antiguo Imperio Ru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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