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5년 전
국가안보국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내부였다.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기척도 급하게 오가는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일정한 속도로, 마치 누군가 미리 정해둔 흐름 안에서만 움직이는 듯한 느낌. 묘하게 정돈된 공기였다.
태준은 12층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걸음은 일정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바닥에 닿는 발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남았고 그 소리가 복도를 따라 길게 이어졌다. 복도 끝 방 앞에 도착한 그는 문 앞에 서서 손을 들어 올렸다. 복도를 따라 두 번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건조하게 떨어지는 목소리.
태준은 짙은 눈썹을 한 번 추켜올리며 숨을 고른 뒤 손잡이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어떤 표정으로 들어왔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소식 들었지? 그때 합류하면 돼. 배달만 해.
그럼 나머진 저쪽에서 알아서 한다.”
짧고 건조하게 이어지는 말들.
태준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왜 접니까.”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이미 밖으로 드러났다. 몹시 찌푸려 좁아진 미간, 비대칭으로 틀어진 입꼬리를 통해서.
“야, 이 새끼야. 물어볼 게 없어서 그런 걸 물어봐?“
남자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너 무슨 경찰이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처럼 왜 그래.”
그는 태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마는 거지.
그 정도는 이제 알 때도 됐잖아.”
태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선도 자세도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하, 이 새끼.”
남자가 고개를 젖히며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야, 나도 미대 출신이야.
싫다고 안 하면… 방법 있어? ”
잠깐의 침묵.
“질문 그만하고 나가.”
남자는 다시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태준은 남자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문을 여는 순간 바깥의 공기가 조용히 밀려 들어왔다. 태준은 처음보다 더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복도를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3일 후
저녁 8시
태준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10분 후면 타겟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대화를 시작할 캐런은 4년 전부터 이 날을 위해 타겟에게 접근해 왔다. 골목 안쪽에 세워진 검은색 밴 안에는 타겟과 같은 모습을 한 대체품, 쉘이 대기 중이었다.
거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오갔고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일상의 대화 소리가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쪽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얇게 깔려 있었다. 서로를 알아보는 사람들, 그러나 모르는 척 지나치는 시선들. 멈추지 않는 발걸음 속에 미묘한 합이 맞춰져 있었다.
여자가 타겟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예정보다 조금 빨랐다.
그들은 태준과 멀지 않은 거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직 캐런은 이쪽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태준은 신호를 보내려다 머뭇거린 후
한 박자 늦은 신호를 보냈다.
“타겟, 조기 진입.”
캐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계획과는 다른 위치였지만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여자와 마주쳤다.
“나나씨!”
친근하고 익숙했다. 둘은 아이들 이야기와 얼마 전 참석한 모임 얘기를 나눴다. 타겟은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길고양이를 발견한 아이는 쪼그려 앉아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완벽했다.
태준은 검은색 밴 쪽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차 문이 열리며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쉘을 끌어내리듯 데리고 나오며 태준을 거칠게 노려봤다.
“망칠라고 작정했어?”
노파는 태준을 밀치고 쉘과 함께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위치를 잡고 있던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 번 반복했던 시뮬레이션. 걸음의 속도, 시선의 방향, 서로의 간격까지 완벽하게 맞춰진 움직임이 한순간에 펼쳐졌다.
노파는 타겟 쪽으로 다가가 구부정한 몸을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그 순간, 두세 명의 행인이 아주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며 그 주변을 스쳤다. 시야를 가로지르는 몸들, 잠깐 멈춰서는 발걸음, 어깨가 겹치는 거리.
그리고 찰나의 틈.
노파는 타겟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아이의 몸이 공중으로 살짝 들렸다가 그의 품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아이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순간조차, 주변의 움직임에 묻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스치듯 지나가며 쉘의 외투를 벗겨냈다. 그 아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타겟과 동일한 모습이 드러났다. 옷, 체형, 머리 모양, 움직임까지.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
타겟은 이미 사라졌고 쉘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나나는 여전히 캐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웃으며, 간간히 아이가 있던 방향을 바라보면서.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 멈췄다. 몇몇 사람이 그 사이를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보였을 때—
익숙한 아이의 뒷모습.
나나의 표정이 풀렸다.
“그 얼마 전에 있던 생일파티 때 말이에요.”
캐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은 유난히 말이 많았다. 자신의 아이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나는 자연스럽게 더 시간을 내어주었다. 캐런의 안쓰러운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 아이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없다.
사라졌다.
갑자기 소리라는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나는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를 피하다 부딪혔고, 부딪히다 밀쳤다. 갑자기 사람들이 몇 배는 많아진 것 같다.
그때 나나의 눈에 들어온 양갈래 길.
왼쪽은 집으로 가는 방향이다.
나나는 들고 있던 짐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지고 왼쪽으로 달려갔다. 캐런은 나나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울음이 이어지다가—
툭, 멈췄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상황 종료.”
왼쪽 길은 어른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았다. 한쪽은 울타리가 처져있고 다른 한쪽은 차도였다. 좁은 길 사이로 바람이 몰아쳤다. 가로등이 있다 해도 간격이 지나치게 넓어 빛이 닿지 않는 구간이 훨씬 많았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순간적으로 나나를 비췄다. 밝아졌다가, 다시 깊게 가라앉는 어둠.
나나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숨이 가빠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안아!”
목이 찢어질 듯한 나나의 외침이 좁은 길을 타고 퍼졌다.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아이가 어둠 속 어딘가에서 대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반대쪽 길.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빛이 닿지 않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절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또렷하게 형태를 갖는 순간이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지.
나나는 잠깐 숨을 삼켰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아이가 집으로 먼저 갔을지도 모른다.
집에 가는 길은 자신 있다고 했던 아이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일부러 숨은 걸 수도 있다.
만나면 혼내줘야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나나는 좁은 길을 에워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미친 새끼.”
밴으로 돌아온 노파가 가면을 벗어던졌다.
가면 아래에서 드러난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160 남짓한 키의 젊은 남자. 목선을 따라 남아 있는 분장 자국이 땀에 번져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거칠게 티슈를 꺼내 얼굴을 문질렀다. 하얗게 칠해져 있던 피부가 얼룩지듯 지워지고, 눈가에 남아 있던 주름 분장이 뭉개지며 아래로 번졌다. 그 사이로 드러난 왼쪽 뺨의 깊은 흉터.
“오늘 일 보고 올리고 나서도 어디 잘난 척 하나 보자.”
말을 마친 그는 혀로 입 안을 한번 굴리며 여전히 남아 있는 분장의 찝찝함을 털어내듯 얼굴을 더 세게 문질렀다. 곁에서 조용히 서 있던 태준이 입을 열었다. “아이는…” 남자는 고개를 들어 태준을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
그 눈빛에는 노골적인 피곤함과 짜증,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가지가지한다더니.”
그는 차에 올라타 거칠게 문을 닫자마자 검은 밴이 출발했다. 짧은 엔진소리를 남기고 차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캐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천천히 태준에게 다가왔다.
“왜 그랬어요?”
가벼운 어조였지만 시선은 날카로웠다.
“태준 씨는 아무 상관없잖아요.”
한 걸음 더 가까이.
“아는 여자예요?”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보겠습니다.”
태준의 한마디에 그녀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굳었다.
태준이 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무리하게 보폭을 맞췄다. 구두 소리가 조금 더 빠르게 바닥을 두드렸다.
그녀가 입가에 얕은 미소를 걸고 다시 말을 건넨다.
“설마… 그런 거예요?
옳지 않은 일은 하기 싫다, 이런 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준이 우뚝 멈춰 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아낸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준에게 한 발 더 다가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태준의 목을 양팔로 감싸 안았다.
몸을 밀착시킨다.
순간, 낯선 향이 퍼졌다.
달콤하지만 무겁지 않은, 어딘가 이국적인 향기.
익숙하지 않아서 더 또렷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잠깐 멈추게 만드는 향.
캐런은 숨을 고르듯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생각을 바꿔요, 태준씨.”
몸의 무게를 그에게 그대로 기대며, 더 가까이.
“기준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태준은 그녀를 거칠게 밀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필요 없습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캐런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태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표정은 평온했다.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는 눈빛.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귀 안쪽으로 스며드는 신호에 반응했다.
“손 못 떼게 해.”
짧게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아, 물론 잠시 휴가는 주고.”
신호가 끊기자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중 절반 이상은 같은 작전에 참여한 인원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않는 척, 자연스럽게 섞여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구두 끝에 무언가 묵직하게 걸렸다.
쉘의 흔적이었다.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 잔여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단숨에 붕괴되도록 설계된 개체다. 타겟의 외형과 행동 패턴까지 정교하게 모사할 수 있지만, 유지 시간은 길지 않다. 신호가 끊기면 순식간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존재.
그 과정이 막 끝난 참이었다.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일부가 바닥에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열기가 캐런의 발등에 닿았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구두 끝으로 그것을 가볍게 밀어냈다. 흔적은 곧 바닥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마치 이곳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거리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 가득했던 곳은
어느새 평범한 저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