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드러난 신호

by 이유나





나나는 태준과 함께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바깥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밀려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전광판 아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움직였고 서로 다른 언어들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소음처럼 퍼져 나갔다. 나나는 잠시 그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나나!” 공항을 가를 듯한 라드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나는 고개를 돌렸다. 갈색 배낭 하나를 어깨에 걸친 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오는 그가 보였다. 과장된 몸짓과 라드니 특유의 환한 표정. 변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반가울 정도로 그는 여전했다.




“저분이에요?” 태준이 나나의 뒤에서 물었다. 나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라드니 쪽으로 걸어갔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라드니가 먼저 팔을 벌렸고 나나는 자연스럽게 그 품 안으로 들어갔다.

“나나, 왜 이렇게 말랐어. 다이어트 할 필요 없잖아.”

“다이어트는 무슨.”

나나는 한 걸음 물러나며 라드니의 불룩한 배를 힐끗 바라봤다.

“다이어트는 라드니가 해야겠는데요?”

라드니는 자신의 배를 톡 치며 웃었다.
“다 살자고 먹는 거 아니겠어?”

둘 사이에 가벼운 웃음이 오갔다.

그때 라드니의 시선이 나나의 뒤쪽으로 향했다.

“택시기사님?” 라드니의 물음에 나나가 대답하려는 순간, 태준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태준입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태준씨는 경찰이에요.” 라드니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다가 나나의 말에 멈칫하며 그녀를 슬쩍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걱정과 의문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나나는 어깨를 가볍게 들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드니는 그제야 태준의 손을 잡았다. 둘 사이에 짧지만 묵직한 악수가 오갔다.




“갑자기 한국에 무슨 일이에요? 다음 달 아니었어요?”

차가 공항을 완전히 벗어날 때쯤 나나가 물었다.

“정부에서 불렀어. 예정보다 빨리. 나, 선택 없었어.”

사람의 기억을 사고파는 기억상점. 분명 합법적으로 존재해 오던 사업이지만 최근 들어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기술에 대한 통제와 윤리 문제를 이유로 정부는 점점 더 강하게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개입의 뒷면에 있는 정부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태준의 말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태준은 거울을 통해 나나를 흘끗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나나도 그를 바라봤다. 두 시선이 마주치자 태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태준의 눈에 뒤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따라오는 검은 밴 한 대가 들어왔다. 속도도, 거리도 묘하게 일정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집요했다. 태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두 사람, 꽉 잡아요.” 태준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어?”

라드니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태준의 차는 차선 사이를 빠르게 파고들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뒤따르던 검은 밴 역시 지체 없이 방향을 틀었다.

그 움직임은 분명했다.

“뒤에 차, 붙었어요.”

태준의 낮은 목소리가 차 안을 가라앉혔다. 그는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았다. 엔진이 울리며 속도가 빠르게 올라갔다. 도로 위 차량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태준은 그 사이를 정확하게 계산하듯 차를 밀어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룸미러 속 검은 밴이 갑자기 시야를 가득 채웠다. 거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두 대 간격을 유지하던 차가, 순식간에 바로 뒤까지 따라붙어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거칠게 번쩍이며 태준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두 차량 사이의 간격이 거의 사라졌다. 조금만 브레이크를 잘못 밟으면 그대로 들이 받힐 거리였다.

“하…”

태준은 곧바로 핸들을 틀어 옆 차선으로 비껴갔다.
앞에서 달리던 트럭과의 간격이 거의 없는 상태로 스치듯 지나가자 지켜보던 라드니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노면을 긁는 타이어 소리가 날카롭게 지속됐다. 검은 밴도 지체 없이 따라붙었다.

속도는 이미 위험한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다.




앞쪽으로 신호등이 보였다.

노란불.

태준의 시선이 빠르게 계산하듯 흔들렸다.

지나간다.

그는 망설임 없이 가속을 더했다.

차가 신호를 끊듯 교차로를 통과했다.

그리고—

동시에 태준은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교차로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우측으로 이어지는 좁은 도로로 차를 밀어 넣었다. 검은 밴은 직진을 이어가다가, 한 박자 늦게 방향을 틀었다. 그 짧은 틈을 태준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방향을 바꾸며 골목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시야가 짧은 길.

차를 한 번 더 꺾고, 곧바로 속도를 줄였다.

몇 초나 지났을까.

태준은 천천히 거울을 올려다봤다.

검은 밴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차 안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라드니가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대며 말했다.

“우리 왜 도망가는 건지 누가 말 좀 해줄래요?”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라드니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걸.




테이블 위에는 막 나온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뜨거운 국물이 담긴 그릇에서 김이 천천히 위로 피어올라 공기 중에서 흐릿하게 흩어졌다. 방금까지 끓고 있던 열기가 먹음직스럽게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식당에서 세 사람이 앉은자리만 고요했다. 그 침묵을 깬 건 라드니였다. 그는 괜히 물컵을 만지작거리다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한 번 훑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나… 내일 되기도 전에 죽는 거 아니지, 나나?”

조금은 웃으려는 듯했지만 전혀 웃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혹시 이거… 음식에 독이라도 있을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나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 마요. 라드니. 저쪽도 일을 복잡하게 만들 생각은 없을 거예요.

그냥 우리가 알아서 물러나라는 신호겠죠.”

나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단단하게, 그러나 조용히 눌러주는 힘이 있었다.

“같이 가요. 내일.”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해요, 우리.”

그 말이 끝나자 테이블 위로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동안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준이 그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라드니와 나나 사이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여기서 끝낼 겁니까?”

나나와 라드니, 두 사람 모두 예상하지 못한 그의 질문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나나는 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뭘 알고 말하는 거예요?” 태준은 잠시 숨을 고르듯 마른 입술을 손으로 한번 훑었다.

“나나 씨가 이 시스템을 처음 만든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다음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세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눈에 보일 것처럼 무거워졌다.

라드니가 먼저 반응했다.

“아니, 그거—”

그는 태준을 향해 몸을 숙이며 급하게 말을 이었다.




“오, 나나 그런 사람 아니야. 그리고 우리는 그냥… 작은 가게야. 진짜 별거 없어.”

나나는 그런 라드니를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가볍고 밝은 웃음이었다. 긴장으로 단단하게 굳어 있는 공기를 일부러 느슨하게 만드는 듯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국자를 들어 올렸다. 그릇 표면의 식은 국물이 걷어지자 안쪽에 남아 있던 열기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나는 조용히 그 음식을 덜어 라드니와 태준 앞에 차례로 내려놓았다.

“자, 일단 먹죠.” 담담한 말투였다.

“라드니 말대로, 살려면 일단 먹어야 하니까요.”

짧게 웃으며 덧붙였다.

“어서요.”




김이 거의 사라진 음식 위로 얇은 막처럼 식은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태준은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시작했다. 식당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옆 테이블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졌고 주방 쪽에서는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직원이 분주하게 오가며 주문을 확인했고, 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공기가 잠깐씩 스며들었다.










“겁만 준 겁니다.”

어두운 차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가 거의 없는 한적한 사거리, 가장 오른쪽 차선에 검은 밴 한 대가 멈춰 있었다. 엔진은 꺼지지 않은 채 낮게 진동하고 있었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그 정도면 알아들었을 겁니다.

눈치는 없어도 미련하진 않은 여자니까요.”

그때 뒤에서 짧고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울렸다.

빵—

남자의 입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창문을 천천히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남자는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차를 흘겨봤다. 어수룩해 보이는 노인의 실루엣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휴대폰 너머로 이어지는 말소리에 남자가 짧게 대꾸했다.

“아이만 보여주면 다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말끝이 낮게 깔렸다.

이어지는 상대방의 말소리에 남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가 다시 풀리길 반복했다.

그때였다.

빵— 재차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남자는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

그는 휴대폰을 천천히 내리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의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왜소했다. 160 남짓한 키, 마른 체구. 육중한 검은 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몸집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그러나 정확한 방향으로 뒤차를 향해 걸어갔다. 아스팔트 위에 그의 발소리가 작게 울렸다. 주변은 한적했고, 신호등의 빛만이 교차로를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운전석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톡, 톡.

유리창을 두 번 두드렸다.




안에 있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주름진 얼굴 위로 노인의 놀란 눈이 도드라졌다. 노인은 유리창을 내릴까 말까 고민하는 듯 손가락을 창문 버튼 위에 올려뒀다. 그 순간이었다. 차 밖에 서있던 남자의 손목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손목 안쪽에서 얇은 금속 패널이 조용히 미끄러지듯 열리더니 그 안에서 손가락 두 개 정도 길이의 작은 장치가 튀어나왔다.

빛도, 소리도 거의 없었다.

찰나의 순간—

공기를 가르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노인의 이마를 정확히 관통했다.

번쩍이는 섬광조차 아니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나간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미세한 광선이었다. 노인의 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으나 그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노인의 시선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눈동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흔들리다가—

멈췄다.

텅 빈 표정이었다.

몇 초.

그리고 갑자기—

노인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쏠렸다.

쿵.

이마가 핸들에 부딪히며 그대로 고개가 떨어졌다.

경적이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빵——————




끊어지지 않는, 단조롭지만 앙칼진 소리였다.

남자는 아무 감정 없이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장치는 이미 다시 손목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돌려 주변을 살폈다. 한적한 교차로. 지나가는 차량도 사람도 없었다. 확인하듯 잠시 서 있던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로 돌아갔다.

검은 밴은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교차로를 벗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경적 소리만이

텅 빈 교차로 위에 길게 울려 퍼졌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