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약속한 거다, 정상에서 만나자.

by 준지


어제는 서브스턴스를 보고, 오늘은 송혜교를 보고 느낀 점.


타인의 시선에 맞춘 목표는 나를 어떻게 무너트리게 하는지

(남들에게 인정받는 직장에 합격하는 것, 남들이 부러워하는 몸매가 되는 것 등)

내가 망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인생 마지막 날,

마주하는 나 자신에게 떳떳하게 웃어줄 수 있게끔 중심 잘 잡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더 많은 여자 유명인들과 소시민들이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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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브스턴스'는 이제는 정상에서 내려와야 하는 한때 미모의 톱스타가 젊음을 되찾기 위해 과욕을 부리다 벌어진 재앙을 이야기한다.



이런 주제의 스토리는 뻔하다.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고, 결국 젊음과 아름다움이라는 유한한 가치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인데 다만 그동안에 봤던 영화들과 다른 점이라면 정말 영화의 본질인 시각 효과를 미친 듯이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래.. 젊음에 집착하지 말자' 수준이 아니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아 나 진짜 지금 외모에 만족하고 살 테니까 그만 끝내주라' 수준까지 가게 만든다.


어찌 보면 외모에 집착하지 말라고 되레 가스라이팅 하는 수준이다.


나름 한국에서 살고 있는 20대 여성치고는 수더분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해 왔는데

'요즘 살 좀 찐 거 같다?'는 말에 미친 듯이 운동장을 뛰었던 기억, 앞니 하나가 너무 작은 거 같다는 말에 항상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던 지난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별 것도 아닌 문장들에 왜 그렇게 요동쳐왔는지 어린 날의 나와 외모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많은 여성들에게 남 시선에 휘둘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검은 수녀들 시사회를 가게 되어 그렇게 이쁘다는 송혜교 실물을 볼 생각에 기대되는 나 자신.

항상 깨우친 척 하지만 한참 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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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대로 송혜교는 정말 예뻤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사실 시사회에 갔던 이유는 송혜교의 실물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톱스타의 기운을 실제로 느껴보고 싶어서가 더 컸다.


대중들에게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톱스타의 저력, 잠시 주춤하는 듯했지만 내실을 다져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게 된 성공한 사람의 기운을 실제로 느껴보고 싶었다.



서브스턴스를 본 다음 날이라 그런가,

송혜교 예쁘다는 말보다 송혜교 잘했다는 말이 더 하고 싶었다.


계속 예쁘다고만 칭찬하는 게 그녀에게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런데 걱정할 필요 없을 듯하다.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는 말처럼.


실제로 들은 송혜교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각오한 듯했다.


이제 진짜 연기 잘할 거니까 지켜봐라는 듯한 각오가 느껴진다


그래서 너무 좋았다.

현명한 그녀가 슬픈 소식으로 어느 날 대중을 충격에 빠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지난 3년, 그리고 올해로 4년.


아빠를 떠나보내고 내 인생이 후져졌다.. 고 생각했다.


낭만을 쫓아 지원한 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해보니 왜 선비들이 부자가 될 수 없는지, 이화여대 국문학과 출신 과장님의 연봉이 나랑 왜 큰 차이가 없는지, 내가 정말 잘못 첫 단추를 끼운 건지 계속 후회했다.


또래 엄마들보다 예뻐서 항상 학부모 참관회에 오길 바랐던 자랑스러운 우리 엄마가 왜 저렇게 사별의 슬픔을 극복하지 못해서 시들어버렸는지, 왜 무리한 투자로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 경제적 고통까지 나눠주는지 다 같이 으쌰으쌰 해보자 했지만 실은 원망스러웠다.


중산층은 된다고 믿었던 집안이 결국은 하루아침에 휘청할 수 있는 집안이었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서른을 목전에 두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후짐의 조건들이 사실은 내가 느끼는 게 아니라 남의 시선에 맞춘 것임을 조금씩 자각한다.


박봉인 것은 사실이나 책을 읽는 것이 즐겁고, 교정할 때 희열을 느낀다.

근무시간에 책 읽으면서 월급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연봉이 nnnn은 되어야지' 같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업무적으로 아무런 불만이 없다.


어쩌면 아빠가 없다는 슬픔도 날 동정하는 친척들의 눈빛이 싫어서,

아버지 잘 계시냐는 질문을 던져놓고 뒤늦게 사과하는 타인의 말들이 싫어서 더 슬퍼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슬픔마저도 온전히 내 것으로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시험에 합격했던 순간도, 다이어트에 성공했던 순간도

자기 효능감에 웃었겠지만 남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어 즐거웠던 것 같다.


내가 울고 웃었던 순간을 내가 온전히 즐길 수 있었나 생각하니 인생 목표를 달리 세워야겠다는 결심이 든다.



1. 올해는 박경리 토지를 완독 할 것이다. 상반기까지 10권, 하반기까지 10권.


2. 액션이 오면 확실히 리액션을 할 것이다. 누군가 제안을 하면 기꺼이 승낙하고 단호하게 거절할 것이다. 우물쭈물해서 여지를 주지 않으려 한다.


3.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밤 12시 전에 잠들 것이다. 괜히 웃어보려고 재밌는 영화를 찾아보거나 책을 읽거나 하다가 새벽에 잡생각에 잠기지 않고 그냥 잘 것이다.


4. 울고 싶을 때 그냥 울 것이다. 층간소음 때문에 가끔 울고 싶어도 조인성 주먹짤처럼 틀어막고 숨죽여 울었는데, 옆집이 새벽마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눈치 보지 않고 오열하려 한다. 흥!


5. 정상에 오를 것이다. 은유적인 의미도 담겼지만 말 그대로 산을 탈 것이다. 4년 전만 해도 주말에는 항상 북한산을 등산했었는데 요즘은 산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톱스타의 기운만 느껴볼 것이 아니라 높은 산의 기운을 받을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지 않고 중심을 꽉 잡고 달려주면 좋겠다.


연기 인생 45년 차에 자신을 옥죄어온 프로듀서의 평가를 이겨낸 데미 무어도

미모의 여배우라는 코르셋을 벗어던지려는 송혜교도

사별의 슬픔에서 벗어나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엄마도

불안하고 무섭지만 잘 살아보려고 북한산으로 향하는 나 역시도



우리 약속한 거다! 정상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