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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침묵의 시대

신의 이름으로 닫힌 세계

by 더블윤
"When the gods are invoked to explain mystery, they tend to reinforce ignorance rather than promote enlightenment."
“신을 불러 미스터리를 설명하려 할 때, 우리는 계몽이 아닌 무지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칼 세이건


"I do not feel obliged to believe that the same God who has endowed us with sense, reason, and intellect has intended us to forgo their use."
“우리에게 감각과 이성, 지성을 준 신이 그것을 쓰지 말라고 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고대 그리스에서 움튼 과학의 불꽃은 찬란했지만, 그것은 오래도록 타오르지 못했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유럽 대륙은 암흑 속으로 침잠했고, 과학의 정신은 서서히 꺼져갔다.

인간은 더 이상 별을 올려다보며 질문하지 않았고, 세계는 신의 뜻으로 포장된 절대적 질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초기 중세의 문명은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신의 계시를 내려다보며, 인간의 사유는 성서 속에 갇혔다. 철학은 신학의 하녀가 되었고, 과학은 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이단이 되었다. 자연은 더 이상 탐구의 대상이 아니었고, 우주는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가 아닌,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교리가 되었다.

중세 사회의 중심에 있었던 교회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신과의 관계로 대체했다. 지식은 권력으로 귀속되었고, 학문은 성경 해석을 벗어나지 못했다. 병의 원인은 죄악이었고, 천재지변은 신의 징벌이었다. 사유의 자유는 ‘신성모독’으로, 질문은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인간은 살아 있었지만, 질문은 죽어 있었다.

그 시대의 인간은 불확실성과 혼란 속에서 절대적 권위를 갈망했고, 신은 그 갈망을 채워주는 유일한 해답이었다. 그렇게 질문은 믿음에 자리를 내주었고, 사유는 종교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갔다. 변화보다는 안정을, 탐구보다는 복종을 요구하던 시대. 그곳에서 과학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중기 중세로 접어들면서 유럽에서는 스콜라 철학이 등장했으나, 그것조차도 교리 해석과 신학적 논변에 집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재발견되었음에도, 그것은 자유로운 사유가 아닌 신학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 도구로 활용되었다. 인간의 이성은 신의 계시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제한되었고, 과학은 다시 신학의 수종으로 머물렀다.

그 결과, 천 년 가까이 유럽 문명은 정체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천문학은 점성술로 대체되었고, 의학은 주술과 기도로 퇴행했으며, 물리학과 수학은 신학자의 논리 안에 갇혀버렸다. 병의 원인은 신의 분노로 해석되었고, 의술은 기도와 금식에 의존했다. 농업은 여전히 삼포제를 벗어나지 못했고, 기술 혁신은 미미했다. 지식은 수도원의 필사본 속에 갇혔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지식은 폐쇄되었고, 변화는 억제되었다. 그 어떤 이론도, 그 어떤 발견도 ‘신의 섭리’를 넘어설 수 없었다.

사람들은 기도했지만, 설명하지 않았다. 눈을 떴지만, 바라보지 않았다. 숨을 쉬었지만,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살아 있었지만, 질문은 죽어 있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정답'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왜?'라는 물음은 신성모독이 되었고, '어떻게?'라는 궁금증은 이단의 불길 속에 던져졌다.

유럽 문명의 중심에서는, 과학은 문명의 동력이 아니라, 위험한 사유로 간주되었다. 탐구보다 순종이, 질문보다 신앙이 우선되던 시대. 과학이 물러나자, 인류는 우주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기보다 신을 세웠고, 그 권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바로, 과학 없는 문명의 모습이었다. 변화는 억눌리고, 진보는 정체되며, 인간의 사유는 폐쇄되었다.




과학은 단순한 지식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려는 인간의 태도이자 문명의 동력이었다. 과학은 사유의 자유를 자극하고, 기존 질서에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왔다. 따라서 과학이 침묵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더 이상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과학을 잊은 서방 세계는 고정되고, 생각은 반복되며, 문명은 멈추어 섰다.


그러나 같은 시기, 유럽의 경직된 사유와는 대조적으로 동아시아는 실용 국익형 과학으로 무장해 세계 무역·기계·인쇄·병기에서 최소 두 세대 앞서 있었다. 과학을 실용과 행정, 생존을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하며 계속해서 문명을 진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은 실용 중심의 과학을 바탕으로 인쇄술, 나침반, 화약, 제지술 등을 일찍이 발전시켰고, 이 네 가지는 후에 ‘중국 4대 발명’으로 불리며 세계 문명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반면 유럽은 교회의 지적 통제로 인해 이런 발명을 수용하거나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결과 동양은 상업, 항해, 군사, 지식 전파 속도에서 우위를 점했다.
발전된 목판과 활자 인쇄술은 서적과 정보의 유통을 가속화했고, 이는 제한적이었지만 교육과 지식의 대중화로 이어졌다. 유럽의 지식은 수도원과 성직자 계층에 독점되었고, 라틴어 중심의 문헌은 일반인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동양 문명의 지식인의 수는 서구 문명권보다 압도적인 숫자를 자랑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문명이 ‘내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또한 동양에서는 과학이 행정 시스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컨대 천문학은 역법과 농업력, 세금 징수, 제왕의 정통성을 관리하는 데 활용되었고, 과거제를 통해 수학·천문·지리 지식을 갖춘 관료를 선발했다. 반면 유럽은 문맹률이 극도로 높고, 지식은 성직자 계급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기에 사회 전반의 효율성과 유연성에서 동서양의 문명은 큰 차이점을 보였다.

동양은 과학에 대한 시선을 항상 현실 문제 해결의 도구로 보았다. 때문에 국가적 과제 해결에 과학을 적극 활용했다.
물론 국가 주도의 기술 중심주의는 사유의 자유로운 확장을 제약했고, 근대적 과학혁명의 형태로 진화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분명히 중세 동서양의 과학적 사고의 차이는 단지 학문의 발달 여부를 넘어, 각 문명이 나아간 방향 자체를 갈라놓은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동양은 과학을 통해 문명을 현실 문제 해결형 구조로 설계했고, 서양은 종교적 권위 아래 과학을 억누름으로써 문명의 자생적 성장 기반을 잃어버렸다.
이 차이는 이후 르네상스를 거쳐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급격히 반전을 맞지만, 적어도 중세까지는 동양이 문명 발전의 ‘전위’에 서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타올랐던 과학적 사유의 유산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 세계는 8세기부터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번역 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히포크라테스, 프톨레마이오스, 에우클레이데스 등의 저작이 집중적으로 번역되었고, 이를 단순히 보존하는 것을 넘어서 비판적 재해석과 주석 작업을 병행했다.
이는 고대 이론을 중세 이슬람의 시각에서 재조명하며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연 작업이었다.

알라잔과 이븐 시나는 의학 이론을 정립하며 해부학과 병리학의 지평을 넓혔고, 그들의 저술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중세 의학의 토대가 되었다.
수학 분야에서는 알콰리즈미가 '대수학'의 기초를 세우며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와 십진법 체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븐 알하이탐은 광학 이론을 체계화하고 실험을 통해 시각의 원리를 설명했으며, 이는 훗날 유럽 과학혁명의 인식론적 기초가 된다. 또한 천문학에서는 알바타니, 알-자르칼리 등이 행성의 운동을 정밀하게 관측하고 표를 제작했으며, 이슬람식 천문대는 과학적 정밀성과 국가의 행정력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관측 시스템으로 발전하였다.

이렇듯 중세 이슬람 문명은 고대의 지혜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유와 실험을 통해 과학을 더욱 정밀하고 체계적인 학문으로 진화시켰다. 유럽이 교리의 벽에 갇혀 있던 동안, 이슬람 세계는 오히려 과학을 문명의 심장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실험과 증명의 중요성, 학문 간의 연계성이라는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지적 기초가 되었고, 스콜라철학 중심의 중세 유럽에 이성의 불꽃을 다시 지핀 계기가 된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과학은 고대의 빛을 중세의 어둠 속에서 지켜낸 등불이자, 유럽 르네상스라는 새벽을 밝힌 전초 기지였다고 할 수 있었다.
이슬람 문명이 없었다면, 유럽 문명의 부흥은 몇 세기 더 지체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럽 중세의 암흑기는 이성과 논리의 학문인 과학이 부재한 문명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과학적 사고는 세상을 검증하고, 오류를 바로잡으며,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것이 사라진 세계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없었고, 권위는 질문하지 않는 대중 위에 군림했다.

하지만 그 긴 침묵 속에서도, 별빛은 꺼지지 않았다. 망각 속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아직도 묻고 있었다. 과학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만 침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침묵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과학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시간이 되었다. 그것은 어둠이 있었기에 빛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과도 같았다.

과학이 다시 깨어날 때, 문명은 단지 발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게 될 준비를 마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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