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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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바람소리만이 스쳐 지나가던 들판 너머로, 이질적인 기계음과 로터의 회전음이 서서히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개활지에서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GU의 것으로 보이는 전투기가 공기를 찢는 굉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달려요, 칼리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다시 숲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투기에서 쏘아진 미사일의 속도는 우리가 낼 수 있는 어떤 속도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머리 위를 스쳐 간 미사일이 우리가 달리고 있던 앞쪽 지면에 떨어지며,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굉음과 함께 형형색색의 꽃들로 뒤덮인 땅이 폭발에 휩쓸리며 솟구쳤고, 흙들이 기둥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폭풍 같은 충격파가 우리를 덮쳤고, 우리는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져 풀밭을 굴렀다.
“윽…!”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온몸이 저릿했지만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우리를 지나쳤다고 생각했던 전투기의 기계음이 여전히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불어오는 칼바람을 막으며, 손가락 사이로 전투기를 바라보았다.
공중에 정지한 그 전투기의 조종석이 푸른빛으로 번쩍이며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삼각형의 날개 아래 달린 거대한 덕트 팬이 요란하게 회전하며, 강한 풍압이 들판을 휘저었다. 풀잎과 흙먼지가 사방으로 날려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었다.
외부에 드러난 무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수많은 무기 시스템이 이미 우리를 겨누고 있다는 걸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옆에 엎드려 있던 칼리뮤도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이를 악문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슈욱―!
공기를 예리하게 가르는 소리가 등뒤에서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기도 전에, 작은 미사일의 그림자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쾅―!
눈앞이 순식간에 붉은 섬광으로 물들었다. 곧이어 폭발음이 몸을 쪼개듯 울려 퍼졌다.
전투기가 공중에서 산산조각 나며 불타는 잔해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뜨겁게 달궈진 금속 파편이 쏟아지자 나는 본능적으로 칼리뮤를 끌어안고 몸을 굴려 피했다. 등 뒤에서 흙과 잔해들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심장박동이 귀를 때리는 와중에 겨우 고개를 들자, 전투기가 추락한 불길 속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로 흩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흐릿한 흙먼지 너머에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댓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숲에서 들판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진흙을 튀기며 한 명이 가장 앞에서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실루엣을 보는 순간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노라씨! 칼리뮤씨! 괜찮아요!?”
딜런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긴장으로 굳어있던 근육이 풀리듯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곤 칼리뮤를 부축해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딜런은 우리에게 달려오자마자 거의 들숨과 날숨도 잊은 듯한 속도로 질문을 쏟아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두 분 다 멀쩡한 거죠!?”
그는 우리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안절부절못했다. 특별한 외상이 없음을 확인하자, 그는 숨을 길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정말 미안해요… 두 분 다 깨어나지 않아서… 혼자서 도움을 청하러 갈 수밖에 없었어요. 너무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나는 그제야 딜런 뒤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초록빛 위장복을 입은 무장한 인원들. 검게 칠한 얼굴 탓에 흰 눈동자와 하얀 이가 더 도드라져 보였고, 팔뚝에는 하나같이 파란 지구 문양의 패치가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내 말에 딜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비켜섰다.
“네. ‘지구의 자녀’에요. 추락 지점을 찾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딱 마주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어요.”
그때 그들 중 가장 체구가 작은 인물이 헬멧을 벗으며 다가왔다. 짧은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머리카락 사이로 강인한 눈빛이 번뜩였다.
“금성 출신 노라 그린비씨 맞죠? 그리고 보라색 머리의 여성… 당신이 칼리뮤군요.”
단호하지만 따뜻한 목소리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엘렌. ‘지구의 자녀’ 오세아니아 지역 사령관입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잠시 머뭇했지만 이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짧지만 단단한 악수였다.
엘렌의 시선이 칼리뮤의 등 뒤 금속 캡슐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표정을 숨기듯 다시 헬멧을 눌러쓰며 말했다.
“이야기는 이동하면서 하죠. 여기서 오래 머무는 건 위험합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딜런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뮤와 나는 서로를 바라본 뒤 조용히 숨을 고르고, 그들의 뒤를 따라 숲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따라 숲 속을 한참 동안 걷자, 조그만 오솔길과 함께 몇 대의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운전석을 둘러싼 창문들과 네 개의 바퀴. 겉모습만 보면 분명 자동차였지만, 지금껏 내가 봐온 것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전체적인 형태는 거칠고 투박했으며, 사람만큼이나 커다란 타이어에는 갈색 진흙이 질척하게 붙어 있었다.
“시동 걸어. 서둘러 주둔지로 복귀한다.”
엘렌이 낮게 말하자 주변의 대원들은 잽싸게 차량에 올라탔고, 시동을 걸자 낮은 기계음이 조용히 울렸다.
“당신들은 나와 함께 타요.”
엘렌이 자동차의 문을 열어젖힌 채로 나와 칼리뮤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이동하는 길은 예상 그대로 험난했다. 숲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통과하느라 운전수는 쉬지 않고 핸들을 이리저리 꺾었고, 울퉁불퉁한 땅 위를 달릴 때마다 차량은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차량이 요란하게 요동치는 와중에도, 차 안에는 묘하게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나와 칼리뮤는 서로 말이 없었고, 그저 조수석의 엘렌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에 대해선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침묵을 깨고, 엘렌이 말문을 열었다.
“지구에 남겨진 자들이자 생존자들. 그리고 동시에 지구를 회복시킨 사람들. 전 그런 우리가 자랑스러워요.”
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GU는 그런 우리를 멸종시키려 하죠. 당신들처럼 지구를 버린 자들이 말이에요.”
나는 무언가 변명처럼 한마디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투에는 비난도, 적의도 없이,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엘렌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텨왔어요. 지구를 회복시킨 것도, GU와 맞서고 있는 것도… 결국 모두 생존을 위해서죠.”
어느새 숲은 끝났고, 차량은 폐허가 된 백색 도시를 가르고 있었다. 운전수는 GU의 감시를 신경 쓰는 듯 경계의 눈빛으로 하늘을 두리번거리며, 조금 더 속력을 올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 상황은 좋지 않아요. 생존자들은 줄어들고 있죠. GU의 군사력에 대응하기엔, 코어리움 같은 자원이나 그것을 활용한 기술이 없으니까요.”
엘렌의 시선이 칼리뮤 쪽으로 향했다. 칼리뮤는 긴장한 듯 몸을 약간 움츠렸다.
“그래서 필요해요. 당신들의 도움이. 우리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반격의 신호탄’이 필요하거든요.”
“만약… 우리가 도울 수 없다고 말한다면요…?”
칼리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짧은 침묵 뒤,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도착했어요. 바로 저기입니다.”
그녀가 기리 킨 곳에는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작은 터널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터널은 지하 깊숙이 이어져 있었고, 한참 동안 내려간 끝에 넓은 홀로 이어졌다.
홀 중앙에 차량이 멈추자, 엘렌이 먼저 조수석의 문을 열고 내려섰다. 우리도 조용히 뒤따라 내렸다. 뒤이어 다른 차량에서 내린 딜런도 어느새 우리 곁으로 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넓은 주차장을 연상시키는 큰 홀에는 수많은 차량들이 줄지어 있었고, 녹색 군복을 입은 사람들은 정비나 운반 작업으로 분주해 보였다.
천장의 백색 조명은 전력 부족 때문인지 간간히 깜박거렸고, 사람들은 그 현상이 이미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 곁으로 몇 명의 대원이 다가와 엘렌의 장비를 건네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바쁜 작업 때문에 우리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따라와요. 도시라 부르기엔 민망한 곳이지만… 우리만의 지하 도시를 소개해 줄게요.”
엘렌은 홀 끝의 커다란 철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우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선을 거두고, 그녀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