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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iness

# 58

by 더블윤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https://brunch.co.kr/@6121f01a108340c/79




Girl's


끝없이 펼쳐진, 현실이라 믿기 어려운 들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와 함께 걷고 있는 이 순간 그대로,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든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겠다고.
지금 이 감정이,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 느껴보는 떨림, 전율, 그리고 경이.
아마도 지금 나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감정의 근원은 무엇 때문일까?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 때문인 걸까?
차가운 우주공간이 아닌, 따뜻한 대기 속에서 바라본 태양은 더없이 눈부셨다. 바람에 섞인 꽃 향기가 피부에 닿으며 내 온몸을 감싸 안았다.
흩날리는 꽃잎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바람을 타고 흘러간 꽃잎 하나가 노라의 옷자락에 가만히 머물렀다. 꽃잎을 따라가던 내 시선은 자연스레 그의 얼굴에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 감정의 근원은, 지금 이 풍경 속에서 나와 함께 서 있는 노라였다.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차갑고 단단했던, 오랫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벽이 허물어진 자리에서 새어 나온 감정은 놀라울 만큼 따뜻했다.
빛나고 있는 것은 분명 우리 주위의 풍경이었지만, 지금 내 가슴속 어딘가, 그 무엇이, 이 세상의 어떤 빛보다도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눈앞에, 하얀 날개를 가진 작은 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며 날아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섬세한 날갯짓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고향은 철로 되어 있어요. 이 드넓은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인공 행성이죠.”

손끝을 들어 나비를 향해 내밀었다. 하지만 나비는 내 손가락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가, 햇살 속으로 흩어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노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때는 우리도 지구처럼 자연이 있는 행성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지금 시대를 사는 네리안 중엔,
그곳을 진짜 ‘고향’이라 부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죠.”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노라는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고향을 파괴했어요. 단순히 망가뜨린 게 아니라, 그 행성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죠. 그게 우리가 믿던 진보였어요…”

말을 잇는 동안, 나비 한 마리가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햇살을 머금은 그 흰 날개가 바람에 부유하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늘 그렇게 믿었어요. 은하계를 여행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위대한 존재라고... 이성과 지식의 탐구만이 진정한 가치라고.”

나는 다시 손을 들어 올려 검지 손가락을 나비를 향해 뻗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난 뒤로, 그리고 지금 이곳을 보고 난 뒤로, 모든 게 달라졌어요.”

그때, 나비가 내 앞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조심스레 내 손끝 위에 내려앉았다.
“이제는, 이 광경이… 정말 아름답다고 느껴져요.”

손끝 위의 나비가 살짝 날개를 접었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너무 소중해요.”

내 목소리가 바람에 스쳐 사라졌다.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손가락 끝에서 햇살을 받으며 숨 쉬는 작은 생명, 그리고 그 곁에서 나를 바라보는 노라.

“지금 이 순간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에요.”

그 말과 함께, 바람이 불었다. 나비는 가볍게 날개를 펴더니 푸른 하늘 속으로 흩어져 올라갔다.




우리가 지켜야 하고 이어가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꽃도, 풀도, 나비도. 그것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생존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실제로 우리 네리안들은 그런 것 없이도, 척박한 금속의 행성 속에서 오래도록 잘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있다.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그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가 내 안에서 서서히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채워짐의 중심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 그 사람으로 인해 생겨나는 따뜻한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이것으로 충분한 건 아닐까.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진정한 가치’란, 바로 이런 것들이지 않을까.
서로를 느끼고, 마음이 닿고, 함께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그런 순간들 아닐까.

우리 네리안의 문명은 언제나 지성과 이성이 이끌어온 문명이었다. 논리와 효율, 발전과 완벽을 향한 길.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
그 단순한 일이 이토록 따뜻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나의 상처를 감싸준다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이었다.

노라.
그는 결국, 내가 오랫동안 쌓아 올렸던 벽을 넘어왔다. 다른 이들은 그저 두드려보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그 높은 벽을, 그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무너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어둠 속으로 그는 걸어 들어와,
나를 구원했다.




“노라…”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는 대답 대신,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나는 그 앞에 서서 속삭이듯 말했다.

“또 뭐가요?”
그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물었다.

“있어줘서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볼이 뜨겁게 타올랐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이내, 그의 팔이 천천히 내 몸을 감쌌다. 숨이 멎는 듯 가슴이 두근거렸고, 귓가에 그의 심장소리가 고동치듯 들려왔다. 내 어깨와 머리를 감싼 그의 손끝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의 숨결이 어느 때보다 가까이 느껴졌다.

그는 내 마음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도 천천히 눈을 감고, 그의 넓은 등에 손을 올렸다.

“당신 덕분에… 행복해요.”
나는 그의 귓가에 닿지 않도록,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정한 평화였다.
하지만 그 평화가 깨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품속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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