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암갈색의 토양 위에 검은 부츠가 살며시 내려앉자, 밑창 아래의 흙이 부드럽게 뭉개지며 부스슥 소리를 냈다. 금속으로 된 차가운 바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푹신한 감촉이 발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주위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그 빼곡한 잎 사이로 은빛 햇살이 부서져 새어들었고, 그 빛이 잎의 윤곽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
공기는 그 어느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청량함을 품고 있었다. 풀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폐 속 깊숙이 스며들었고, 숨을 쉴 때마다 기분 좋은 서늘함이 몸 안을 맴돌았다.
숲 어딘가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메아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마저도 숲이 가진 신비로움을 오히려 완성시키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풍경을 천천히 훑어보며, 내 스스로에게 알려주듯 낮게 중얼거렸다.
“이게… 숲이에요...”
칼리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끝없이 솟은 나무들의 윗부분에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르비트에도 인공 공원이나 정원이 있었지만, 그곳의 나무들은 모두 계산된 높이와 각도를 가진 조형물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이 숲은 달랐다.
깊게 대지 속으로 뿌리를 내린 단단한 주춧돌,
오랜 시간에 걸쳐 세워진 두꺼운 기둥,
하늘에 닿을 듯 뻗어 오른 생명의 지붕.
이곳의 나무들은 인간의 손으로 길러진 생명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자라난 대지의 건축물이었다.
지구 위의 생명은 보호받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인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조금 걸어가 볼까요…?”
나는 조용히 칼리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더니, 자신의 손가락을 천천히 내밀어 내 손가락 사이로 끼워 넣었다.
그 손가락의 얽힘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나뭇가지들의 얽힘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노라의 옆에서 그와 나란히 걸었다.
그가 부츠를 살짝 들어 흙길의 감촉을 느끼려는 듯 천천히 발을 디딜 때마다, 그 어색하고 신중한 걸음이 이상하게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숲 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울음소리도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친근한 노래처럼 들렸다.
지저귐.
그래, 그런 단어였던 것 같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부스럭 소리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든 신경이 곤두섰지만, 그 끝에 마주친 것은 늘 조그만 생명체들이었다.
그중 한 마리가 겁도 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작은 얼굴에 비해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그 녀석은 우리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두 손에는 자기 얼굴만 한 열매가 들려 있었다.
“귀여워요.”
나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작은 생명체는 툭 소리를 내며 나무 위로 재빨리 달아났다. 조금 뒤, 높은 가지 위에서 그 녀석이 열매를 갉아먹으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정말이지, 평화로운 숲이었다.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몰랐고, 우리가 여전히 추격받는 처지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불안이 잠시 멎은 듯했다.
이 풍경은 낯설고도 신선한 감정으로 우리를 감쌌다.
“칼리뮤.”
노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딘가를 바라보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길 봐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멀리서 유난히 밝은 빛이 나무 기둥 사이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숲의 끝자락, 수목 한계선 근처일 것이다.
“아, 잠깐만요, 노라!”
그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와봐요, 칼리뮤!”
그의 목소리는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빛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그를 뒤따랐다. 그러다 그가 빛에 닿아 멈춰 선 순간, 나 역시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뛰는 거예요? 너무 무리하면 안...”
다음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풍경이, 빛과 공기의 결 사이로 천천히 드러났다.
그곳은 분명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살아오며 이런 풍경을 눈으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진 속에서도, 기록 속에서도 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세상.
정말 지구가 이런 곳이었다면, 끝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 자신들의 손으로 이 행성을 지키려 했던 이들의 마음이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갔다.
“아…”
말문이 막혔다. 내 입에서는 그저 짧은 탄성만이 새어 나왔다. 그 어떤 언어로도, 그 어떤 표현으로도 이 풍경을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온 세상을 뒤덮은 생명의 색, 그리고 그 위에 흩뿌려진 이 세상의 모든 색.
초록빛 들판 위엔 이름 모를 꽃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꽃들을 처음 보는 듯 바라보았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꽃’이라 불러왔던 것들은 진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껏 봐왔던 건 진짜가 아니었어요… 진짜는… 이런 것이었군요…”
입안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보아왔던, 살아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껍데기였는지도 모른다.
오직 이곳, 지구에서만, 진정한 생명이 그 찬란함을 숨 쉬고 있었다.
처음 보는 풍경.
하지만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은 이 풍경.
그 앞에서 나는 꼼짝없이 서 있었다.
칼리뮤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입을 살짝 벌린 채, 긴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요를 깨는 듯,
“아름다워요…”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듣는 단어였다. 그 생소하면서도 따뜻한 음성이 부드러운 공기를 타고 내게 전해졌다. 덕분에 나는 그 말을 되새기듯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앞의 풍경을 담고 있었고, 빛에 젖은 눈동자 속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름다워요.”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그 단어를 음미하듯 느리게 반복했다. 그리고 이내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살짝 미소 지은 정도가 아니었다. 분명, 진심으로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도 같은 감정이 솓아 올랐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것을 보고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고 있어서일까.
지구는 그 어떤 행성도 갖지 못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생명을 길러내고, 모든 생명을 품어주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지구가 가진 진짜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찬란한 빛 속에서, 그녀의 마음속 어둠이 사라져 가고 있다.
칼리뮤는 말없이 꽃들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녀의 손끝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꽃잎들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 감촉을 새겨 넣듯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노라.”
그녀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함께 걸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손을 잡아 나란히 섰다.
높고 푸른 하늘 위, 태양이 따뜻한 빛으로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걸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낯설지 않은 멜로디였다.
내가 예전에 불러주었던 노래.
그 노래의 선율이, 지구의 바람 속으로 부드럽게 흩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