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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step

# 56

by 더블윤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https://brunch.co.kr/@6121f01a108340c/79




Boy's


한참을 내 품에 안긴 채 조용히 흐느끼던 칼리뮤가 천천히 몸을 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분명한 안도의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아니, 그것은 단지 표정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안도감이 마치 내 감정인 듯,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진 않았다.
치명적인 상처와 함께 정신을 잃었던 것 같고, 어렴풋이 그녀가 나를 치료하고 있던 그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흐릿한 꿈 속에서 그녀를 만났던 것 같다. 그 내용은 안개처럼 흐릿했지만, 확실히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녀와 내가,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그녀와 이어져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박동, 혈류의 흐름, 폐를 드나드는 공기의 미세한 떨림이 내 몸속에서도 같은 리듬으로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마치 내 감정처럼 함께 피어올랐다.

코끝이 붉어진 그녀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상처는 어때요? 괜찮아요?”

나는 옷자락을 살짝 들어 복부를 살펴보았다.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흉터 하나 남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덕분에 멀쩡하네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 많이 걱정했나 봐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녀는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쏘아봤다.

“그렇게 웃어넘길 상황이 아니었어요. 하... 그래도 이렇게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정말 괜찮긴 한가 보네요.”
그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말도 마요. 설명해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냥… 알려고 하지 말아요.”

“많이 울었어요?”
“날 놀릴 생각 하지 말아요, 노라.”

“놀리려는 게 아니에요.”
“당신 정말 죽을 뻔했어요. 이번엔 정말로요.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알아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죠.”
“거짓말. 당신이 하는 말은 다 거짓말뿐이라, 이젠 '괜찮다'는 말도 믿기 어렵네요.”

“봐요. 나는 정말 괜찮아요... 모두 당신 덕분이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 복부로 이끌었다.
그녀의 약간 차가운 손끝이 상처가 있던 자리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핑크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도 덩달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기분이 좋아요. 당신이 눈물을 흘릴 만큼 나를 걱정해 줬다는 사실이, 그게 너무 고맙고... 좋네요.”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보랏빛 눈동자가 잠시 내 시선 속에 머물렀다. 그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딜런은… 어딜 갔을까요?”
칼리뮤가 작게 헛기침을 한 뒤, 쑥스러운 듯 주위를 둘러보며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그제야 나도 조종석 안을 살폈다.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온 나뭇가지와 낙엽의 잔해들이 우리가 겪은 혼란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딜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소피.”
나는 손목에 입을 가까이 대고 불렀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단말기를 확인하자, 방전된 화면 위로 ‘충전 필요’라는 문구만 깜박이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요…”
내가 중얼거리자, 칼리뮤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GU라면 추락한 잔해를 확인하기 위해 정찰기를 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많은 시간이 지나진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이곳에 오래 머무는 건 현명하지 않았다. 언제든 정찰 드론이 상공에 나타날 수 있었다.
딜런의 행방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움직여야 했다.

“칼리뮤, 필요한 것만 챙기죠.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아요.”

칼리뮤는 이미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Girl’s


우리는 꼭 필요한 물자들만 작은 배낭에 담았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스며든 공기에서, 지구의 대기가 호흡에 무리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그래서 가장 크고 무거운 장비들은 과감히 두고 갈 수 있었다.

지구...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록은 인간의 현재 거주지인 화성에 대한 것뿐이었다.
지구는 그저, 옛날 인간들의 고향, 그리고 네리안의 옛 고향처럼,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성 중 하나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 이곳이 조금은 궁금했다.
이곳이 정말 생명을 품은 행성이라면, 그 생명의 온도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셔틀의 해치 앞에 섰다.
부서진 금속문 틈으로 흙냄새와 바람이 스며들었다.

한 걸음, 지구의 대기 속으로 내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지구라는 행성의 대지 위에 발을 올렸다.






Boy's


내가 지구를 처음 만난 건 학교 역사 시간이었다.
그때 교실에서 보았던 영상은 지구를 완전히 황폐한 곳으로 그려놓고 있었다. 물론 그 자료도 오래된 것이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지구의 현재 모습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믿었다.
화면 속 대기는 회색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쇠와 돌로 지어진 건물들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대지는 인공 쓰레기로 뒤엉켜 악취가 전해지는 듯 보였고, 영상 속에서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때의 나는, 지구가 세상에서 가장 폐허 같은 곳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여기로 오면서 처음 지구의 푸른빛을 보았을 때, 그 단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행성의 넓은 면을 덮은 푸른 바다와 초록빛 대지, 내가 늘 보아온 금속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생명이 숨 쉬는 색들이었다.
사실, 누구나 ‘영구 폐쇄된’ 그 행성을 한 번쯤은 밟아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리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보다 황폐해졌을지라도, 인류의 고향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 금지된 땅의 흙을 밟고 서 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지구라는 행성의 대지 위에 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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