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의 문명과 그림자
“The unleashed power of the atom has changed everything, save our modes of thinking, and thus we drift toward unparalleled catastrophe.”
"원자의 힘은 모든 것을 바꾸었지만, 우리의 사고방식만은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전례 없는 재앙을 향해 떠밀리고 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미 언급한 바 있듯, 산업혁명은 인간의 삶을 근본부터 바꾸어놓은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과학은 이 모든 변화를 가능케 한 중심에 있었다.
과학과 결합된 기술은 상호 자극 속에서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 갔다. 쌓여가는 이론은 기술의 혁신을 낳았고, 발전된 기술은 더 정밀한 실험과 정교한 이론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과학과 기술은 서로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점점 더 강력한 동반자가 되어갔다.
1차 산업혁명기(약 1760~184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과학기술은 인류 문명의 방향을 결정짓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알레산드로 볼타가 전지를 발명하고, 오스테드가 전류에 의해 자기장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어서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함으로, 인류는 발전기와 전동기라는 놀라운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전기는 토머스 에디슨(전구, 발전소), 니콜라 테슬라(교류 송전)의 손에서 본격화되며,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의 핵심 동력이 된 '전력'이라는 힘을 얻게 된다.
새로운 연료인 석유의 발견과 그것을 사용하는 내연기관의 개발은 새로운 운송 기술의 발달로 이어졌다. 기차는 더 빠른 속도로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했고, 자동차, 비행기 등 새로운 운송수단이 등장하자, 인류 문명의 시공간은 더 넓고 빠르게 확장되었다.
통신 기술의 도약도 운송 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세계를 축소시키는 데에 힘을 보탰다. 모스 전신기 발명은 정보 속도의 혁명을 가져왔고, 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은 소통의 속도를 음속에서 광속으로 전환시켰다.
화학 산업도 날로 발전하여 합성염료, 비료, 폭약 등 화학 합성기술이 급격히 발달했다. 프리츠 하버와 카를 보슈의 암모니아 합성법(하버-보슈 공정)은 식량 생산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고 이는 인구 폭발로 연결되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지구의 인구는 약 9억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이후 200년 동안 인구는 약 9배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산업혁명기 이후에 등장한 기술들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이다.
폭발적 인구성장에 기여한 것은 화학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식량 생산량 증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루이 파스퇴르의 세균 이론 확립, 백신 개발과 로베르트 코흐의 결핵균 발견 등 의학과 생물학의 발전이 그 성장의 밑바탕이 되었다. 또한 세균이론의 확립은 공공 보건과 위생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었고, 위생 개념의 확산은 수명과 생존율의 획기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과학은 더 이상 이론에 머물지 않고, 삶과 문명에 실질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기술과 과학이 결합된 '과학기술 문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며, 이는 화학, 전기, 석유 및 철강 분야에서 기술 혁신을 이룬 2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다.
산업혁명은 인류의 생산력과 생활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지만, 그 대가로 전례 없는 규모의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을 초래했다.
무엇보다 석탄 사용의 폭발적인 증가는 대기오염의 시대를 열었다. 증기기관과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태워진 석탄은 막대한 양의 이산화황(SO₂)과 미세먼지를 대기 중에 방출했고, 이는 도시의 하늘을 그을음으로 가득 채웠다. 런던, 맨체스터, 버밍엄 같은 산업 도시들은 항상 스모그에 뒤덮였고, 햇빛조차 뿌옇게 가려졌다. 이러한 오염은 호흡기 질환과 조기 사망률 증가로 이어졌으며, 산업 도시의 삶을 건강과 안전의 측면에서 위태롭게 만들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를 전례 없는 속도로 태워왔다. 그 결과, 지구의 수십억 년 역사에서 어느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탄소가 단기간에 대기 속으로 방출되었다. 이 급격한 탄소 축적은 지구의 기후 균형을 흔들고, 인류가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의 기후 변화를 불러왔다.
하천과 강은 산업 폐수의 배출구가 되었다. 방직·염색 공정에서 나온 화학 염료와 중금속, 금속 가공 과정에서 생긴 납·수은·카드뮴 등이 여과 없이 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로 인해 수생 생태계는 빠르게 붕괴했고, 식수 오염으로 인한 장티푸스·콜레라 같은 수인성 질병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토지 역시 산업의 확장에 따라 변형되었다. 도시 팽창과 철도 건설, 채광과 벌목은 숲과 습지를 빠르게 파괴했고, 농경지는 기계화와 집약 농업으로 인해 토양의 영양분이 고갈되었다. 특히 채광 지역은 산림이 베어지고, 갱도 붕괴와 토사 유출로 인해 생태계가 장기간 회복되지 못했다.
또한, 산업혁명 이후의 생산 방식은 ‘속도와 효율’을 최우선시하면서 자연의 순환과 회복 주기를 무시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경제적 성과를 높였지만, 장기적으로는 환경 수용 능력을 넘어서는 지속 불가능한 구조를 낳았다.
결국 산업혁명은 인류가 처음으로 자연의 한계를 대규모로 넘어선 시점이 되었고, 현대 환경 문제의 뿌리는 이 시기에 깊이 내려앉았다. 우리가 오늘날 직면한 기후변화, 대기오염, 수질오염, 생물다양성 감소 같은 위기들은 모두 그 시절부터 이어져 온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그렇게 힘을 얻게 된 기술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을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연을 통제하고 재구성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향상된 기술을 통해 강의 흐름을 바꾸고, 토지를 반듯하게 나누었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던 지형조차도 놀라운 속도로 인간의 손에 의해 재편되었다.
처음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점차 그 방향은 ‘더 많은 통제’, ‘더 높은 생산성’, ‘더 빠른 속도’라는 목적에 쏠리기 시작했다. 문명은 조율이 아닌 압박을 택했고, 복잡한 생태계의 흐름을 단순하고 직선적인 질서로 바꾸려 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했던 것처럼, 자연은 이제 ‘고문받아 비밀을 말하게 될’ 대상이 되었고, 과학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과학은 더 이상 ‘이해의 학문’이 아니라, 정복의 기술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산업혁명의 이기에 감춰진 문명의 위기는 자연파괴뿐만이 아니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구조 속에서 자본주의는 본격적으로 확장되었고, 이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층 구도도 뚜렷해졌다. 노동 조건의 악화와 불평등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의 싹을 틔웠다. 아동 노동과 장시간 노동, 저임금은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팽창하는 인구와 도시화는 이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편리함과 풍요의 상징인 동시에 고립, 노동 소외와 같은 새로운 그림자의 상징이 된 셈이다.
여러 문명은 이러한 내부갈등을 제국주의와 결합된 배타적 민족주의로 해결하려 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각 문명의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국내의 수요만으로는 이를 모두 해결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산업국은 값싼 원료를 지속적으로 구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생산한 제품을 판매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이러한 배경 위에 등장한 것이 제국주의였다.
철강·화학·기계 기술이 군함, 소총, 대포, 기관총의 성능을 혁신적으로 끌어올렸고, 이는 해외 진출에 절대적인 우위를 제공했다. 산업혁명으로 성장한 국가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시아·아프리카·태평양으로 진출해 식민지를 확보를 위한 경쟁을 시작했다. ‘아프리카 분할’(Scramble for Africa) 같은 사건은 산업국들이 군사·경제력을 총동원해 영토를 확보한 대표적 사례이다.
많은 식민지 보유는 곧 국가의 ‘위대함’과 ‘근대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는 더욱 치열한 국가 간 경쟁을 야기했고, 이를 통한 국가 간 적대와 군비 경쟁을 심화는 민족주의적 열망과 결합하게 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민에게 “우리 민족은 우월하다”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주입해 해외 팽창을 지속적으로 정당화했다. ‘문명화 사명’이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그들은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도덕적으로 합리화했다.
팽창 과정에서 식민지, 자원, 시장을 두고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직접 충돌하기도 했으며, 유럽의 긴장 구조를 고착시켰고, 결국엔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면전의 토양이 되었다.
산업혁명이 불러온 진보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 지구적 재앙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전 지구적 충돌도 이때부터 일어나게 된다.
과학기술은 이 충돌의 시기에도 고개를 내밀었으니, 바로 전쟁터에서는 죽음을 정밀화하는 기술로 사용된 것이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소총이 주력 무기였지만, 1차 대전에서 맥심 기관총(Maxim gun) 같은 자동화기 도입으로 전투 양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분당 500~600발 이상을 쏠 수 있는 기관총의 등장은 분당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가장 잔혹한 학살기계였다. 수백 미터 전방을 ‘죽음의 지대’로 만들며, 각국의 젊은 청년들은 서로의 진영을 향해 돌격할 때마다 확정된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기관총에 의한 학살도 무자비했지만, 1차 세계대전 시 사망 원인의 절반 이상은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곡사포·야포의 사거리와 위력은 크게 향상되어 있었고, 참호 속 병사도 이 포격에 안전하지 않았다.
화학의 발달은 이보다 더 끔찍한 재앙을 만들어냈다. 1915년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처음으로 염소 가스를 사용한 이후, 머스터드 가스, 포스겐 가스 등이 전장에서 반복 사용되었다. 가스는 참호 깊숙이 침투해, 방독면이 없으면 폐를 부식시키거나 실명, 피부 화상 등을 입혔다. 이러한 독가스는 사망률보다 고통과 후유증이 훨씬 컸기 때문에, 전쟁 이후까지 수많은 참전용사를 불구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1차 세계대전은 과학기술이 ‘인류 진보’가 아니라 ‘대량 학살의 효율화’로 사용된 최초의 총력전이었다.
기관총이 병사들의 돌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포격이 전장의 절반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화학무기가 인간의 고통을 전례 없이 확장시켰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많은 것을 바꾸어냈지만, 그 변화의 방향은 어느 순간부터 조화가 아닌, 군림하고 파괴하고 배제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과학은 그 잠재력을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과학은 문명을 움직일 동력이 되었고, 그 문명은 파괴와 지배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명의 모습이 과학 그 자체의 본질을 의미하진 않는다.
내가 한없이 사랑하는 과학은, 어떤 권위도 욕망도 갖지 않은 순수한 지식의 결정체이며, 질서와 조화의 원동력이 되어야만 하는 학문이다.
실제로 과학은 가능성의 문을 열어줄 뿐, 그중 어떤 길을 선택할지를 결정한 것은 문명, 그리고 인간이었다.
‘지배의 과학’은 과학의 운명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선택의 결과였다.
그 선택이 반복되고 구조화되면서, 그것은 곧 표준이 되었고, 다른 길은 비효율로 여겨졌으며, 회의조차 허용되지 않는 흐름으로 굳어졌다.
아마 그 시대의 문명은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며 나아가야만 하는 필연적 길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문명은 그것을 ‘진보’라 불렀다.
그러나, 그 길은 정말 진보였을까?
과학은 진화했고, 문명의 진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 진화가 인류를 어디로 데려온 것인지, 우리는 조용히 되물어야 했다.
그러나 실용성과 편리함에 갇힌 채, 과학은 계속 그 길을 걸었고, 문명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이제, 그 강 너머에서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
과학을 통해 태어난,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힘이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