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의 미생
1년 동안 뭐 했지?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글로벌 대기업들을 거쳐 지금은 은퇴하신 분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그는 직장 생활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 한 가지 팁을 건넸다. 연말에는 반드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회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정리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이력서를 업데이트 하라는 거다. 그렇게 1년을 마무리 짓는 시간을 가지면 해를 거듭할수록 이력서의 내용은 풍부해지고, 매년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거라는 조언이었다.
사실 평범한 직장인의 하루, 한 달, 일 년은 가까이에서 보면 항상 같아 보인다. 매일이 반복이고, 매주 어떤 일을 열심히 했지만 잘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아직 저연차여서 그런 탓도 있겠다.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본 경험도 없다. 화려하게 내세울 수 있는 성과는 오롯이 내것이 아닌 회사의 성과였거나 아니면 '그냥 없는' 경우도 많다 ^^; 내가 1년 동안 어떻게 달라졌고, 성장했는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연말에는 정신이 없고 바빠 그의 조언을 잊고 있다가, 1월은 넘기면 안 될 것 같아 잠깐 짬을 내어 오랜만에 이력서를 열어 보았다. 1년 전 이직을 위해 작성했던 이력서였다. 1년 동안 했던 일들을 꼼꼼히 짚어보고, 사소했던 일들까지 떠올려본다. 많은 일들과 굴곡이 있었지만 결국 이력서에는 이 모든 것이 달랑 한 줄 정도로 요약되었다.
하지만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는 경험만으로도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지난 1년이 나에게는 지루한 반복이었지만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느낌과 함께, 잘 적응하고 있다는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큰 칭찬을 받아 보지도 못했고, 엄청난 업적을 세운 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대로 괜찮았다.
23살의 미생
2011년, 대학교 4학년 2학기를 모두 마치기도 전에 한 회사에 덜컥 합격하였다. 겨울방학 내내 달콤한 아침잠을 포기해가며 지하철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하여 인턴 경험을 했던 것이 입사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취업난’ ‘백수’가 우리 사회의 화두였을 때다. ‘삼포세대’라는 신조어가 청년들의 불안한 미래를 대변하기 시작했던 게 기억난다.
실제로도 취업문은 좁았는데, 스스로 스펙을 쌓겠다며 교환학생이니 자격증이니 노력도 했지만 어쨌든 열심히만 하면 뭐든지 된다는 단순명료한 미덕을 나는 더욱 믿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옳다고 말하는 길을 지고지순하게(?) 따라온 범생이 스타일이었기에 앞으로 더 열심히 잘하자는 두루뭉술한 각오에 기대어 휩쓸리듯 입사하게 되었다.
열심히 하면 되겠지
첫 회사의 퇴사는, 어른들이 제시한 ‘트랙’에서 처음 벗어난 사건이었다. 나름 회사에 대한 애정도 컸고 (신입사원 입문 교육에서 회사의 비전과 이념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암기하여 1등까지 했는데 ㅎㅎ) 그게 열정이라 믿었다. 그대로 내 인생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간다고 느꼈다. 처음 해보는 업무를 잘 할 수 있을까, 실수하면 어쩌지, 하는 범생이다운 걱정은 놓지 않았지만 어차피 함께 배우며 일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일도 공부처럼 ‘열심히만’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인사팀의 교육 기간이 끝나 현업으로 출근을 했는데도 한참동안 나에게 제대로 주어지는 일이 없었다. 허드렛일조차 시켜주지 않았다. 나의 멘토 역할을 하기로 되었던 과장님은 밀려드는 업무에 정신이 없어 따로 나에게 멘토링을 해줄 여유가 없었다. 당시에는 신입사원을 가르쳐 일을 떼어주겠다는 계획조차 세울 수 없을만큼 다들 조급했던 모양이다. 선배들은 담당 임원이 시키는 일만으로도 허덕였으니 나를 케어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선배들은 하루 종일 회의실에 숨어서 일을 했다. 자리에 있으면 자꾸 일이 더 생긴다는 이유로 골방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엑셀만 띄워놓고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 건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텅 빈 사무실을 혼자 지키고 있을 때면 잉여 인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은 큰 좌절이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도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며칠을 울다가 사직서를 냈다.
직장인으로서 존재의 이유
성장하고 배워간다는 느낌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게 너무 괴로워 그만 두려 한다는 나의 말에 어떤 분은 “회사는 돈을 벌러 오는 거지 뭔가를 배우러 오는 게 아니다”라고 조언하셨다. 돌이켜보면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건 맞는데, 돈 때문에 다니는 건 아니다.
연말마다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면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나 자신의 성장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작더라도 나름의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성취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버티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나의 시간과 맞바꾼 직장일이 적어도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돌아보는 시간은 꼭 필요한 것 같다.
그때 회사를 그만둔 이후 한참을 방황해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23살의 미생에게 추운 겨울 내내 이른 새벽의 어둠을 뚫어가며 출근하느라 고생했다고, 너는 참 성실했다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던 시간이니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날들을 추억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