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를 보고
다음 글은 영화 <벌새>의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다리가 무너지니.
담임의 야만적인 구호를 복창하는 일도, 부모님의 싸움이 유리 조각처럼 마음에 박혀도, 일상 같이 폭력을 휘두르는 오빠도, 남자친구 절친한 친구와 틀어지고 자기가 좋다던 후배가 돌연 돌아서는 일도.
다 우리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다리 정도야 무너질 수도 있다.
하루아침에 무너진 다리보다 천천히 무너진 관계들이 더 의문스럽게 다가오는 법.
그런 세상은 도저히 알 수 없고 험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지?’라는 영지 선생님의 말처럼.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機人).
험한 세상을 같이 비행할 듯했던 이들의 마음조차 알 수 없는데.
험지로 홀로 처박히지 않으려면 수도 없이 날개를 저어야 하는 벌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지 선생님은 세상을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못할 거 같을 때에도 손가락은 움직이니까.
그 손가락이 신기하다고.
그리고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사람에게는
움직이는 하나의 손가락이, 수 없이 저어야 하는 날개가 아름다울 것이다.
혹은 생기고 재발하고, 그걸 째고 이겨내는 우리는 아름답다.
그러나 흉은 남는다.
그래서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 사이에는
‘그럼에도’라는 단어가 붙을 수밖에 없다.
은희는
담임이라는, 아버지라는, 엄마라는, 오빠라는, 남자친구라는, 절친이라는, 유리라는 혹들을 쨌다.
분명 언젠가는 재발할 이 혹들을,
또 새로 생길 혹들을 째야 하겠지.
하지만 전처럼 날개를 힘겹게 젓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맞서 싸우겠지.
그 과정들에서 흉이 지겠지.
‘그럼에도’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나누어,
그 끝에서 마주할 세상은 신기하고 아름답기를.
은희는, 그리고 우리는,
험지를 건널 다리를 마음속에 세웠을 테니.
그러니
어떻게 다리가 무너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