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삶에서 이렇게 중요하고, 차지하는 포지션이 많은 그런 직업에 관한 안타까운 뉴스들이 오래전부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려와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학교 주방에서 오랜 기간 급식을 담당해 오셨던 급식종사자님들이 오랜 기간 음식을 조리하면서 끊임없이 마셔온 연기 등으로 인하여 폐암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뉴스에서 나왔다.
또 소방서에서 구조활동을 하였던 소방공무원님들이 인명구조 과정에서 자신들이 보아왔던 끔찍한 장면들을 머리에서 지우지 못해 끝내 그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도 뉴스에서 전해 들었다.
소방공무원 2명 증 1명이 트라우마를 경험하였으며 그 경험자 중 74%가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뉴스가 안타까움에 안타까움을 더하였다.
위 두 가지 모두 직업병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생계를 위하여 그토록 노력하고 애써서 구한 직업이 오히려 독(毒)이 되어 그들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앗아가 버렸다.
어쩌면 직업병의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나도 18살이라는 어쩌면 어린 나이에 직업을 가졌었다.
솔직히 그때의 내게는 직업에 대한 추상적인 의미도, 의미부여식 명제도 없었다.
그저 내가 돈을 벌어야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집에 보탬이 되고 그 가난으로 평생을 가슴 한번 펴보지 못하고 사신 가엾은 내 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릴 수 있다는 생각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내 직업이 돈이고 돈이 내 직업이었다.
다행히 내가 선택한 은행이라는 곳은 다른 기업들에 비하여 pay가 좋은 편이었다.
특별히 부유하게 살 만큼의 아주 큰돈은 아니었지만 내가 당초에 원하였던 찢어지게 가난하였던 우리 집의 가난을 '찢어지게'라는 단어정도는 지울 수 있게 해 주었다.
다행히 늘 가난으로 전전긍긍하셨던 가엾은 내 어머니의 얼굴에서도 조금씩의 여유가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술과 잡기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고 자산투자에도 전혀 관심과 능력이 없었던 탓에 돈을 모으는 것이 조금은 수월하였고 그래서인지 조금 일찍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말이 좋아 아파트였지 지은 지 30년이 넘은 25세대 작은 평수 아파트였다)
그 작은 아파트가 종자가 되어 조금씩 아파트 평수를 넓히며 살았다.
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말했다.
"니는 좋겠다.
까만색 가다마이(양복)에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고 여름에는 시원한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주고 겨울에는 히터를 하루종일 틀어주는 좋은 곳을 직장으로 두어서~
거기에다 몸으로 하는 일은 하나도 없고 9시 반에 출근해가(출근해서)4시반 땡카마(땡하면)집에 가뿌는 그런 직장이 대한민국에 어디에 있노?"
그러는 사람들한테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하였다.
"맞지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더"
하였다.
하기사 나도 처음 입행 하기 전에는 은행이라는 곳이 그런 곳인 줄만 알았으니까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싶어 그렇게 말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이 영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말하였다.
그리고 보니 나는 내가 35년간 다녔던 직장에서,
나와 함께 하였던 내 직업에서 견디기 힘들었을 만큼의 고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자주 업무적인 스트레스가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혔지만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 그런 스트레스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연히 직업에서 얻은 육체적 이상으로 병을 얻은 적도 없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다행히 내가 견딜만하였고 실제 잘 견뎌 내었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내게도 직업병이 있었다.
내가 은행에 다닐 때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였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던 것들이 지금 생각하니까 그런 것들이 직업병이었다.
그 하나가 모든 일상을 대할 때 너무 정확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은행원은 매사에 정확해야 한다고 수 백, 수 천 번을 더 들으면서 살아온 것에 훈련이 되고 마음이 동화되어서인지 나는 지금도 모든 것에 너무 정확하게 대하려는 경향이 많다.
아니다.
지나치다.
신입행원 때 하루 마감 결산을 하면서 10원이 맞지 않아 밤을 꼬박 새운 일들이 무수히도 많아 10원도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살아왔는 것 같다.
그것이 나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고 그 가스라이팅이 나를 짓누르고 나를 힘들게 하였다.
누군가와 약속을 하였으면 나는 내가 사고(思考) 하지 못하고 내가 걷지 못하는 지경이 아니면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다.
나의 이런 행동들 때문에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매번 똑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으면서 살았다.
"니는 참 융통성이 없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내가 참여한 거의 모든 모임에서 총무를 맡고 있다.
내 직업이 만들어 낸 나만의 직업병이었다.
또 하나는 친절에 대한 나의 지난 친 잣대이다.
은행원은 고객을 상대하는 직업이고 그들이 상대하는 고객들이 은행수익의 원천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설(異說)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은행은 그런 소중한 고객분들께 최선의 서비스를 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온갖 정책들을 펴왔다.
한 때는 '고객 감동'을 넘어 '고객 기절'을 캐치프레이즈로 삼고 업무에 임한 적도 많았다.
고객이 은행을 이용하면서 기절을 할 만큼 서비스와 친절을 다하자는 정책이었다.
이른바 CS였다.
* CS : Customer Service - 고객서비스
은행의 취지는 좋았다.
고객이 만족하지 않는 은행은 있을 수 조차 없다는 것에는 100% 공감한다.
그러나 이 추상적인 만족과 친절을 수치화하면서 그것들은 본질에서 완전히 왜곡이 되어갔고 그저 5점 만점에 맞추려는 숫자로 된 조금은 기형적인 만족과 친절이 되어 버렸다.
고객들에게 자신이 전 날 거래하였던 은행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지문은 이랬다.
1점 : 매우 불만족
2점 : 불만족
3점 : 보통
4점 : 만족
5점 : 매우 만족
은행들은 고객들에게 5점의 대답을 얻으려 정상괘도에서 살짝씩 벗어난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은행객장에다 고객들이 가져가서 쓸 수 있는 볼펜을 얹어놓고 볼펜 겉에다 '5점, 매우 만족이라 대답해 주세요.'
라 인쇄해 놓기도 하였다.
하기야 은행영업실적과 전혀 무관하게 CS성적이 좋지 않은 최고 책임자는 따로 문책을 하였으니 이런 행동들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18살 어린 나이에 이런 친절교육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한 내게 어쩌면 귀여운 직업병이 생겼다.
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참으로 친절하게 대한다.
택시를 탈 때도 나는 기사분께 내가 먼저 인사한다.
공공장소에 갔을 때 그곳에서 경비를 서시는 분이나 청소를 하시는 분들에게도 내가 먼저 인사한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에도 내리고 타는 사람 전부에게 내가 먼저 인사한다.
여기까지는 병(病)이 아니다.
어쩌면 아주 좋은 습관이다.
문제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한 상대가 나에게 한 행동들에게서 내가 상처를 받곤 한다.
내가 택시기사님께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라고 인사하였을 때 그 기사님이 들은 척 만척하시거나 간단히 "예"라고만 대답할 경우 내 마음이 심하게 요동한다.
'저분은 자신의 택시를 이용한 고객인 나한테 자신이 먼저 인사를 해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왜 저러실까?
내가 앞으로는 다시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하나 봐라.'
고객 친절과 인사에 관하여 깊은 공부를 한 나는 그 기사님께 이런 대답을 기대하였는지 모르겠다.
"아이고 손님~
어서 오세요.
오늘 날씨가 참으로 좋지요?
이렇게 저희 택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이것과 비슷하게 인사를 해 주시는 기사님도 많으시다.
그런 분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렇지 못한 분을 만나면 기분이 상해지는 나는 아직도 옛날 엄청난 압박감으로 친절과 인사를 공부하였던 은행원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 보인다.
퉁명스럽게 인사를 받은 그런 분들을 보고 '내 다시는~~~' 마음먹고 다시 택시를 타고 또 지난번처럼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하는 나는 직업병을 가지고 있는 듯싶다.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