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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r Luna May 09. 2023

떠나와야 찾을 수 있는 것


 La Garriga 민아 사장님 숙소의 내 방에는 아주 크고 푹신한 침대가 있었다. 그 침대는 눕기만 하면 마법에 걸린 것 같아져서 나는 그곳에 지내는 내내 오래 앓은 불면증이 무색할 만큼 깊은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침대 옆으로는 창문을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긴 책상이 있었고, 나 혼자 쓸 수 있는 욕실이 한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창밖엔 기찻길과 함께 가슴 벅찬 풍경이 시시각각 다르게 펼쳐졌다. 특히 해질 무렵 노을이 내린 풍경, 깜깜해진 밤에 빛나는 마을의 가로등, 새벽녘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내는 건너편 집의 지붕과 나무의 기지개는 보는 내내 마음을 비워내게 했다. 숙소는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방에서도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 당장이라도 기차를 타러 나가야 할 것 같은 그리움을 풍겼다. 근처 성당에서 시간마다 울려 퍼지는 깊고 무거운 종소리는, 시계를 보지 않아도 30분인지, 정각인지를 알 수 있게 했다. 거실과 주방은 사장님 가족과 함께 사용했다. 중학생인 사장님의 딸 서진이는 학교에 가고, 사장님은 낮 시간에 운동을 가시거나 운영하시는 레스토랑으로 출근을 하셨기 때문에 나는 낮 동안 그 집을 오롯이 혼자 사용할 수 있었다. 내 집처럼 편안히 쓰라는 말씀에 주방에서 사장님의 요리를 돕기도 하고, 설거지를 하기도 하고, 아무도 없을 때는 혼자 맥주를 마시거나 와인을 마시면서 글을 쓰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숙소 근처의 성당을 중심으로 작은 광장을 따라 걸어가면, 몇 개의 상점들과 호텔이 있을 뿐, 대부분 현지인들의 주택으로 이루어진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나는 이렇게 멋진 곳에 살게 되신 이유를 사장님께 물어보았다. 사장님은 서진이의 학교 근처로 집을 구하다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이 마을의 고풍스럽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끌렸다고 하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스스한 모습 그대로 사장님과 서진이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오믈렛, 스무디, 신선한 과일, 주스, 커피, 빵과 잼 등을 있는 대로 차려주시는 푸짐한 아침을 가족처럼 함께 먹었다. 서진이가 등교하고 사장님이 외출을 하고 나면, 나도 집을 나와 산책을 했다.

 어떤 날은 기찻길을 따라 숲 속을 향해 걸었다. 바람이 조금 거세어 춥고, 몸이 떨려서 걷기가 힘들 때까지 걸었다. 산책을 하던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올라!’하고 지나갔다. 이곳에서 유일한 여행객인 듯한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는 인사 한 마디에, 마음에 햇살이 비친 것 같은 날이었다.

 어떤 날은 노트에 글을 쓰고 싶어 펜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한국에서 가져온 펜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숙소 밖으로 나가서 펜을 팔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까르푸에도, 편의점에도 펜은 없었고, 문구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가다 꺾어진 골목길에서 작은 선물 가게를 발견했다. 액세서리와 인형, 장식품을 팔고 있는 가게의 진열장을 둘러보다 펜을 발견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엔틱한 녹색의 볼펜이 보였고 나는 그 펜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가게 사장님이 스페인어로 알려주는 펜 가격을 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서로 답답해하다 결국 계산기를 가져와 숫자로 표시한 4를 겨우 이해한 나는 4유로를 지불했고 둘 다 멋쩍게 웃었다. 나는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노트에 글을 쓰며 오후를 보냈다.

 어떤 날은 광장 옆 카페 ‘abril’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카페는 그리 조용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았고 적당한 백색소음이 편안했다. 카페에서 직접 구워내는 크로와상도 꽤 맛있었다. 나는 5일 동안 머물며 abril에 네 번 갔다.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끄적끄적 낙서를 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번은 운동을 다녀오신 숙소 사장님과 그곳에서 만나 유쾌한 티타임을 가진 날도 있었다. 그곳에 오는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인지, 누군가 카페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거의 모든 테이블의 사람들과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나는 커피 찌꺼기가 잔 바닥에 조금 남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늘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 커피값 1.5유로를 잔돈을 하나하나 챙겨 건네주면 알바생은 나를 지켜보다 늘 ‘perfect!’ 하며 웃어주었다.

 

 떠나와야 보이는 것이 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그려지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밀려와서 그리움이 되고 사무침이 되는 것들이 그려지던 날들이 있었다. 그걸 보기 위해 이렇게 지구 반대편까지 온 것인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 멀리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보이고 그려지는 것들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미리 알게 되어 주저앉게 될까 봐 이렇게 떠나라고 했나 보다. 그걸 알게 된 날조차, 애써 잊고 싶었던 마음들을 La Garriga에서는 잠깐 꺼내어 다독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녹색 펜을 샀던 다음 날 저녁, 배낭 앞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다가 한국에서 가져온 볼펜을 발견했다.

 떠나와야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런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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