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에게 3월은 가장 바쁜 때인데, 고등학교의 경우 1학년 담임을 맡은 3월은 특히나 더 정신이 없다. 17살인 고등학생들이지만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낯설어하는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내용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등하교 시간, 여러 가지 학교 규정, 안전 교육, 도서관 이용 방법, 급식소와 매점의 위치도 알려 주어야 한다. 많은 정보를 입력해 주어야 하기에, 수시로, 틈나는 대로 반복해서 설명해 주고, 우리 반 학생뿐만 아니라 복도에서 만나는 헤매고 있는 신입생들, 궁금한 것이 많은 학생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
“선생님, 영어 전용 교실이 어디예요?”,
“선생님, 음악실은 어디로 가야 해요?”,
“선생님, 쉬는 시간에 학교 밖에 나가면 왜 안 되나요?”,
“선생님, 비 오는 날엔 체육복 입고 등교해도 되나요?”
이런 질문들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오던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급식소에 갔더니 후식으로 과일 주스가 나오고 있었다. 식판마다 하나씩 올려져 있는 플라스틱 컵에 담긴 과일 주스를 보니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후식은 교실에 가지고 가서 먹어도 되었던 코로나 이전 시절이었다. 학생들이 플라스틱 컵 처리를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되었다.
‘점심 먹고 교실에 가서 플라스틱 쓰레기 처리하는 방법을 한 번 더 설명해 줘야겠네.’ 알려주지 않으면, 학생들이 주스를 먹고 난 끈적한 플라스틱 컵들을 그대로 일반 쓰레기통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점심을 먹고 나서, 교실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그만 까맣게 잊고 말았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종례를 하러 가는 중에야 비로소 생각이 난 것이다. 나는 이미 엉망이 되었을 교실 쓰레기통을 상상하며 자책의 한숨을 쉬었다. 점심시간에 학생들을 지도하지 못한 후회만 밀려왔다. 암담한 마음을 안고 교실에 들어가 뒤쪽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교실 뒤쪽에는 점심시간에 나왔던 플라스틱 주스 컵들이 깨끗하게 세척된 채로 포개져 탑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믿기지 않아서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았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플라스틱 컵들은 주스 자국 없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일반 쓰레기통에 버려진 플라스틱은 하나도 없었다.
“이거 누가 이렇게 다 씻고 정리했니?” 나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자상한 담임으로 변해서 물었다.
“M이 점심시간에 친구들에게 이렇게 하자고 말해서 각자 다 씻어 왔어요.”라고 아이들은 밝게 말했다.
수줍게 웃고 있는 M에게 물어봤더니, 급식을 먹으며 나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일반 쓰레기통에 플라스틱을 버리지 못하게 교실에 컵을 들고 오는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이렇게 씻어서 말려 놓고, 한꺼번에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리자고 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따랐고, 즐겁게 각자의 컵들을 씻어왔다고 했다.
나는 내 지루한 상상력을 반성했다. 무조건적으로 알려주고, 설명해 주는 것에만 연연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학생들의 내면을 잘 이끌어낼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3월의 오후, 선한 영향력을 지닌 한 명의 학생이 한 행동은, 교사의 지시적이고 강압적인 지도보다 울림 있는 힘을 전파했고, 교실을 아름답게 했고, 지구 환경을 조금이나마 덜 아프게 했다.
아이들이 돌아간 텅 빈 교실, 오후의 햇살에 플라스틱 컵들이 눈부시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