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의 어머니, 아버지,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들

탈출 시그널을 외면한 자가 감당해야 하는 것

by 봉봉


억새꽃은 수수하지만 햇볕을 만나면 세상 근사해진다.

나는 억새꽃으로 프로포즈 한 남자와 결혼했다.


살면서 받아본 꽃이라곤 졸업식때 부모님이 주신 것 말고는

딱 세번이었다.


남자친구의 프로포즈-억새꽃

남자친구의 생일선물-수국

결혼식날 부케 ㅎㅎㅎ


달랑 세번이었는데, 모두 같은 남자가 주었다.


"여러분 저는요, 비가 와도 생각나는 첫사랑이 없어요."

산울림의 김창완 아저씨의 말이 생각날 때도 있지만

이번 생은 이 남자랑 함께 하게 되었다.



남자친구가 물었다.

"너는 나랑 결혼하면 어떻게 살 생각이야?"

"응? 신혼부부들한테 뭐 전세금 대출해주는거 있지 않어? 그거 받아서 집 구하면 되지 않을까?"


어디쯤이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데,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었다.

저런 이야기를 하다 잠깐 차를 세우라고 하더니

반짝반짝 빛나는 억새꽃을 들고 "나랑 결혼하자"고 했다.


억새11.jpg 억새. 억새와 갈대 구분 못해서 엄청 깨지곤 했다
갈대.jpg 갈대. 억새와 비슷한듯 하지만 다르다.


남자친구는 자신의 경제상황을 모두 깠다. (오픈했다)

하나도 숨기지 않고.

독립해 살던 오피스텔 전세금을 빼서 지금 부모님의 새 아파트에 보태며 합가했고,

부족한 돈은 자신이 대출받아 갚고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개털이란 애기였다.

나이는 마흔인데

벌어둔 돈은 0원, 본가 대출금은 #억.

그걸 오롯이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버지 병원비며 어머니 용돈까지 책임지고 있는

그 집안의 기둥(이라고 쓰고 물주라고 읽는다)이었던 것이다.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단 한번도 그에게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인데

결혼을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철딱서니도 없고 계산도 못하니

(그래도 지금은 계산은 한다. 더 이상 불이익은 참을 수 없다)

남자친구가 좋으면, 좋은 사람이랑 결혼하면 된다,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결혼이라는 실물경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으로서

겸손하지 못하게 겁대가리 없이 더하기 빼기 없이 그냥 직진했다.


게다가 나도 개털이었다.

남자친구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돈이 없는 것은 매 한가지였다.

남자친구에게 매달 150만원씩 모으자고 했다.

나는 100만원, 남자친구는 150만원

250만원씩 모으면 (큰돈이었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그러기로 했다.

결혼반지와 결혼식+신혼여행만 하기로 했다.

웨딩촬영도 하지 않았다.

남자친구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대출이 있다고 했다.

기쁜 마음에 그걸 알아보자고 했더니 이미 풀로 당겨썼다고 했다.

어디에 썼나?

형과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고 했다.

보통 돈은 내가 있는 걸 빌려주는 게 아닌가? 나도 없어서 대출까지 받아 빌려줘? 이상하다?


아. 본능적으로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를 만나기 전의 일이었고, 내 눈에는 오직 사랑만이 가득했나보다.

그의 가족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덮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해 남편이 된 후 남편과 엄청나게 싸워댔다.



남자친구는 1000에 70짜리 월세를 살자고 했다. 그거 낼 능력은 된다고 했다.

나이 마흔에 결혼하는데 집 한칸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브랜드 아파트? 신축? 넓은 집? 그런거 따질 여력이 없었다.

외곽에 30년도 넘은 2억4900만원 짜리 20평 아파트를 사면서 3억을 대출 받았다.

시부모님이 사는 본가 아파트 대출금에 우리 신혼집 대출금까지 짊어진 시작이었다.

내 월급만으로는 대출금만 감당하기에도 벅찼고,

남편 월급만으로는 대출금은 감당됐지만, 생활비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둘이 벌어야 했다.


시부모님은 그 집에 계속 사셨고,

시어머니는 혼수를 바라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남편은 그 얘기를 내게 전하지 않았다. 나중에 물으니 그 얘기하면 결혼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쿠쿠 밥솥을 결혼선물로 주셨다.

남편은 부모님께 옷 한벌씩 해드리자고 했다. 덕분에 나도 내 부모님께 옷 한벌 선물해드릴 수 있었다.



탈출.jpg 탈출은 문이 열려있을 때 할 수 있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

남자친구의 생일이었다. 남자친구 본가 식구들과 식사 약속이 잡혔다고 했다.

아주버님네 식구 4명, 예비 시부모님, 남자친구와 나 이렇게 8명이 갈비집에서 만났다.

돼지갈비를 먹었다. 냉면도 시켜 먹었다.

조카 하나가 "오늘 삼촌 생일이니까 삼촌이 쏘는거지?" 하는데

아무도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다. 생일케잌도 없었다.


8명의 식사를 남자친구가 계산하고 나가는 길,

남자친구의 집으로 가는데 슈퍼에서 조카둘이 검은 봉지를 흔들고 있었다.

"삼촌 이거 계산해 줘."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어른 4명이 있는데 그 아이들의 과자는 삼촌이 계산했다.


그걸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 남자친구, 그러니까 내 예비 남편의 역할을 알게 되었다.

탈출하라는 시그널인가.

아니면 내가 속이 좁은 건가.

남자친구는 기꺼이 그걸 계산했다.


그리고 나는 기어코 그 남자와 결혼했다.




keyword
이전 06화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