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와 발리 노이칠
오늘 요시모토 바나나의 얇은 산문집 <어른이 된다는 건>을 읽었어요. 여러분은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염세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늘 산다는 건 뭘까! 하고 고민했었어요. 나이는 분명 어른인데, 가끔 제가 쓸모없고 도로에 날아다니는 비닐 봉지 같아서 내가 산다는 게 의미가 있나? 싶었거든요. 이제는 확실히, 제게 산다는 건 의미가 있다고 말해줄 수 있어요.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요. 알라딘에 가서 사냥하듯 책을 사고 부자가 된 느낌이나, 친구랑 같이 마셨던 차 한잔, 1년 있다 보자, 하는 약속들은 살아있어서 제가 누릴 수 있어요. 작은 것들이 참 소중하네요.
요시모토 바나나는 "사람은 각자가 자기 자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태어났다." 고 생각해요. 잠깐 같이 읽어볼까요?
그렇다면 사람은 뭘 하기 위해 태어났을까요. 저는 각자가 자기 자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끝까지 관철하면, 왜 그런지는 몰라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더군요. 인간이란 애당초 그렇게 생겨 먹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귀찮은 것은 충분히 살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살지 않는 상태에 있으면 주위에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들기 때문에 온 세상이 다 그런가 보다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충분히 산다는 것은 정말 고된 일이죠. 느긋하게 풀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마음속은 언제나 날카롭게 반짝거려야 살아있음이 보장되는, 그런 매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잇달아 밀려오는 파도를 타면서, 몸은 꼿꼿이 세우고, 판단하고, 하지만 마음은 평온한... 그런 상태에 있으면 사람은 그 사람의 본디 모습을 찾게 됩니다. 그 과정에 물론 시련도 있겠지만, 파도를 타면서 헤쳐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밀려오는 파도를 봐도 평안하게. 자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사는 것이다. 저도 이렇게 믿으려고요! 사람이 살면서 자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목적지는 정말 많죠. 성공으로 자기를 밀고 나갈 수도, 사랑으로 밀고 나갈 수도 있습니다. 택할 수 있는 방법도 정말 많아요.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파도를 탈 수도 있고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파도를 탈 수도 있습니다.
유난히 직설적이라, 끔찍하다는 평을 받으면서도 사랑받는 화가인 에곤 실레는 자신의 삶을 화가로서의 성공으로 밀고 나갑니다. 사랑했던 여인인 발리에게 상처 주는 방법을 택하면서요.
1910년대의 커플 그림이네요! 꽈리 열매부터 두 사람의 얼굴 각도까지 누가 봐도 커플 그림이에요. 그림 속 발리는 열일곱 살, 에곤 실레는 스물한 살입니다. 그림에서 풋풋한 첫사랑 바이브가 뿜어져 나오지 않나요? 클림트 편에서, 에곤 실레가 '빈 분리파' 중 한 명이었던 거 기억하실 겁니다. 클림트가 자신의 모델인 발리를 소개해 주면서 둘은 처음 만나요. 그리고 만나자마자 불꽃 튀는 연애와 동거를 시작하죠. 화가들은 첫눈에 반하는 일이 정말 많아요. 부럽네요.
<발리의 초상>에서 파란 눈과 빨강, 초록의 색 조합이 주는 싱그러움이 너무 좋아요. 실레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줄 만큼 에곤 실레의 화풍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성병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여동생의 누드화를 그리기도 하고, 실레에게는 성에 대한 보편적인 도덕관념이 없었습니다.
실레는 '성'을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어요.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했기에 있는 그대로의 행위를 그려냅니다. 둘은 섹스를 하고 있지만 그림 어디에서도 사랑은 느껴지지 않아요. 공허함과 문란함이 더 많이 느껴지죠. 저는 실레의 특유의 선 표현이 꼭 핏줄 같고 아프게 멍들어있는 것 같아요. 얼굴에 얼룩덜룩 멍들고 여자 다리에도 잔뜩 멍들고. 실레는 스스로를 신사라고 포장하면서, 뒤에서는 문란한 생활을 하는 빈 사람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역할을 합니다. 당시 빈은 산업화로 압축 성장을 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졌어요. 하층민들은 가난해졌지만, 상류층 사람들은 겉으로는 신사인척 하면서 미성년자와의 매춘을 일상화하는 문란한 삶을 살죠.
신사의 위선을 까발리는 화가가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그는 비난받고 말도 안 되는 소문에 시달립니다. 비난을 피해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에 정착해서는, 혼전동거를 한다며 눈총을 받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고 싶어 정착한 노이렌바흐에서는 어린 소녀들의 누드화를 그린다는 소문에 시달려요. 주민들은 그를 신고하고 경찰은 그의 작품을 포르노로 규정합니다.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작품 한 점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야 했어요. 그가 유치장에서 그린 미결수의 자화상에는 이렇게 적혀있어요.
“나는 예술을 위해, 그리고 내 연인을 위해 참고 기다릴 수 있다!"
유치장에서 돌아온 그는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미결수의 자화상에는 전투적인 문장을 적어놓았지만, 그 스스로 반항아가 되는 것에 지쳐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평판을 좋게 만들어 그림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실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중산층 여성과의 결혼을 생각해내고 발리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죽음과 여인은 발리와 실레의 모습이에요. 여자는 애절하게 남자를 끌어안고 울고 있지만 남자는 이미 영혼 없는 얼굴로 그녀를 감싸고 있네요.
실레는 발리를 사랑했지만, 화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발리에게 큰 상처를 줍니다. 힘든 시기 그를 지켜주었던 그녀를 버린거나 마찬가지죠. 발리는 이별 후 그를 잊기 위해 종군 간호사의 길을 택하고 전쟁터에서 성홍열에 걸려 사망합니다. 발리와 이별하고 사망한 해, 그녀는 스물 세살이었어요.
사람은 각자가 자기 자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태어났다
쉴레는 발리와 헤어지고 중산층 여인인 에디트와 결혼합니다. 그는 발리를 사랑하지만, 애초에 결혼할 생각은 없었는지도 몰라요. 사랑과 성공 사이, 쉴레의 고민은 100년이 지난 우리가 하는 것과 비슷하네요. 사랑하는 사람의 집안 환경 때문에 헤어졌다는 이야기는 이제 클리쉐가 되었잖아요.
성공을 위해 사랑을 포기할 수 있죠. 사람이 각자 자기 자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태어난다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믿는 대로 선택하는 게 맞습니다. 사랑보다 성공이 더 큰 가치인 게 대수인가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우리의 삶에 관심이 없고, 관심에 떠밀려 선택하고 후회 가득한 삶을 사느니 본인이 욕망하는 선택을 하는 편이 훨씬 나아요. 자신에게도 더 당당하고요. 다만, 선택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진 않는지 유심히 보는 게 어떨까요.
자기 자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건, 늘 자기 곁을 지켜줄 사람들에게 응원받을 일입니다. 다만, 선택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상처는 반드시 삶에 얼룩으로 남게 돼요. 지나치게 본능적으로 선택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면 세상에 태어난 응어리들이 어떤 식으로든 돌아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올바르게 행동하면 마음의 응어리가 없어지는 것처럼요.
매년, 조금씩 나이를 먹어 가고 매일, 조금씩 삶은 복잡해지겠죠. 저는 내일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 더 많이 고민해야 할 거예요. 제목은 '성공을 위해 포기한 사랑'이지만 어쩌다 보니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쉴레는 스물여덟, 발리는 스물 세살에 죽습니다. 생각보다 삶은 짧고, 마지막 선택의 기회는 언제 올지 몰라요.
큰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실레 <죽음과 여인>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지는 않을지 고민하는, 선택 방지턱을 걸어보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