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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디 Jan 26. 2022

목적있는 사랑이 삶에 남긴 상처

에곤 쉴레와 에디트 하름스


에곤 쉴레가 성공을 위해 자신을 사랑했던 발리를 버렸던 거, 기억하시나요? 발리는 이별 후 스물셋에 종군 간호사로 일하다 사망하죠. 하지만 쉴레는 곧바로 에디트와 결혼합니다. 자신의 안정적인 예술 생활을 보장해주고, 화가로서의 권위도 갖게 해 줄 중산층의 매력적인 여자였죠.


 중산층 집에서 태어난 쉴레는 화가로서의 성공에 집착했어요. 그의 누드 모델이었던 발리보다는 자신의 성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에디트를 선택합니다. 확실한 목적이 있는 사랑이었죠.


앉아 있는 한 쌍의 남녀 - 에곤 실레 (1915)

그림을 보면 실레가 좀 더 살이 붙었고, 에디트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어요. 실레는 전보다 안정적인 생활에 만족했고 평범해졌습니다. 비난 받던 누드화도 더 이상 그리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이 그림에 실레가 솜 인형같이 보이기도 해요. 에디트가 실레를 완벽히 소유하고, 자유로운 그는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실레의 눈 초점도 좌우가 맞지 않고요.


중산층의 결혼으로 평범해진 쉴레는 1918년, 빈 분리파 전시에서 성공을 거둡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팔려요. 에디트와 실레는 빈 교외지역에 정원과 커다란 이층 작업실이 딸린 집을 장만합니다. 에디트는 아이를 갖게 되죠.

하지만 임신 6개월 차 스페인 독감으로 에디트가 죽습니다. 6개월 된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 채 죽어요. 에디트가 죽기 전 실레는 그녀의 남동생에게 "내 앞에 큰 무언가가 있는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합니다. 저는 제가 봤던 작품 중 가장 고통스러운 작품을 꼽으라면 저는 에곤 쉴레의 <가족>을 꼽아요.


에곤 실레 - 가족 (1918)

평범한 가족 그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벨베데레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보고 헉! 했었어요. 세명의 가족이 시체처럼 느껴져서였고, 자세히 보다 보니 여자의 발목이 없어서요. 제가 워낙에 표정이 좋다 보니 놀란 게 보였었는지 당시 옆에 계셨던 분이, 에곤 실레의 가족이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여자가 죽었다. 그래서 그림이 무섭게 보이는 거다! 하고 가셨어요. 당시에는 에곤 실레의 삶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그런 뒷이야기가 있구나! 하고 넘어갔었죠. 에디트의 공동묘지에서 돌아오며 그는 아프기 시작했고, 같은 스페인 독감으로 3일 뒤 죽어요. 그가 그려놓은 '가족'이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단 4일, 쉴레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습니다.




흘러갈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괜찮아

저는 에곤 실레의 삶을 찾아보면서, 인생은 정말 계획한 대로 될 수 없구나! 느꼈어요. 화가로서의 성공을 목적지로 자신의 삶을 밀고 나가던 실레는 고통이 찾아오고, 그것을 극복할 순간도 없이 죽으니까요. 예술가들이 인생에서 느끼는 행복은 너무 짧아요. 너무 빨리 죽은 실레를 포함해서, 주위 사람이 모두 떠나고 성공을 짧게 맛본 고갱부터 자살했다고 알려진 고흐까지요.


그래서 저는 매일 야금야금 행복해야겠다! 또 결심합니다. 뭔가에 집착하지 않고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잠들면, 어디서든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믿거든요.


여러분은 오늘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 목적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나요? 모쪼록 저는 목적은 단순한 목표로, 여러분이 집착하거나 상처받지 않으면 좋겠어요. 목표와 집착은 비슷한 듯 달라서, 집착으로 조금만 넘어와도 불행해지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집착은 때로 상처를 낳고,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계속 그걸 남기기도 해요. 학대받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돼서 며느리를 학대하고, 딸이라고 설움 당하던 어머니가 딸을 구박하기도 하고요.


저는 집착하지 않고, 상처 주지 않고 흘러가면서 야금야금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리고 화가들의 삶을 공부하면서, 야금야금 행복했던 모딜리아니나 샤갈이 남겨놓은 그림을 보면,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아직 저는 어려서 이 생각이 우스운 분도, 따뜻한 분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분들과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책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에 나오는 구절을 같이 읽고 싶어요.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 관하여 만들어 낸 생각에 일치하게끔 그 사람을 체험한다. 어느 한 사람을 열광적으로 찬탄한다면, 우리는 그가 저지른 가장 정신 나간 일도 황홀하게 바라보고, 유일하며 비범한 것으로 해석한다. 화난 안경이나 실망한 안경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그를 마음에 안 들고 불쾌한 사람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표상과 표상을 투사하는 배후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사람들을 대할 수 있다. 그러면 사물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무언가에 표상을 투사하는 여러분의 배후는 뭔가요? 말이 너무 어렵네요. 쉽게 말해, 저는 제 속에 없는걸 남에게 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미움으로 가득한 사람이라면, 남에게 미움을 줄 거고 내 속에 사랑이 가득하다면 남에게 사랑을 주겠죠. 제 안에 상처가 가득하고, 비꼼이 있다면 저는 남에게 상처와 비꼼을 줄 거예요.


만약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남자는 어떤 의미든 저와 닮은 사람이겠죠. 제 속에 있는 어떤 걸 알아본 게 사랑한 계기가 될 테니까요. 제가 미워하는 사람이 생겨도 제 안에 없는걸 그 사람에게서 알아볼 순 없으니, 어느 정도는 저와 닮은 사람일 거예요. 하지만 제가 남에게 사랑을 주거나, 미움을 주거나, 어떤 마음을 주어도 그 결과는 저한테로 돌아와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저는 말 한마디도 조심, 행동 하나도 조심해야지, 합니다. 장난으로라도 상처가 되진 않는지 돌아보곤 해요.


화가들의 사랑에도 많은 고비가 있던 것처럼 우리는 가끔 어처구니없이 힘든 일이 밀려오고, 선의와는 상관없이 창피를 당할 수도 있겠죠. 살다보면 그런 날들이 안온한 날들보다 더 많을 거예요. 나에게 올 그런 일들을 막을 순 없지만 그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할 건지는 선택할 수 있어요. 우연한 모욕에 오늘 아침을 내줄 건지, 고양이 모양 구름에 내줄 건지를 결정하는 게 제 자신인 것처럼요. 그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저는 야금야금 행복할 거고, 무언가에 표상을 투사하는 저의 배후는 작은 애정이면 좋겠어요. 그래서 사랑이 좀 더 많아졌으면, 세상이 조금은 더 따뜻해졌으면 합니다. 그렇게 다이어리에 쓰고, 기억하고, 행동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상처받는 날이 적어지더라고요.


내가 상처를 줬구나, 혹은 내가 지금 상처받고 있구나! 너무 아파, 하는 날이면 에곤 실레의 삶과 그림을 보는 것도 좋을것 같아요.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러면서 무언가에 표상을 투사하는 나의 배후에 대해 생각하고, 또 고민해보는 하루 어떤가요? 저는 작은 애정으로 응원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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