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Friday3:13_수수
술 마시고 실수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하나 술을 잔뜩 마신 다음 날엔 왠지 모르게 수치심이 든다.
'술에 취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통용되는 말과 행동의 범주 안에 있었어도 그렇고,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이고. 내 안의 분노를, 사랑을, 슬픔을, 아쉬움을, 힘듦을 어떤 감정을 보였든 그렇다. 그 순간엔 극도로 진심이었겠으나 그다음 날엔 진심이 아니게 될 수도 있는 (그 순간이 지난 다음날엔 온전히 다시 나만의 일이 되어버리니 진실의 여부는 크게 상관없지만) 애매하게 나도 모르게 숨어있던 감정들을 꺼내어 이상하게 방출되는 감정들이 그다음 날의 수치심을 만든다. 술에 취해 격양된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은 이제는 조금 불안하고 불편하다.
술은 죄가 없다. 술엔 언제나 나름의 낭만이 있다. 집에 가기 싫어 거리를 어슬렁대다 친구들과 편의점에서 홀짝이던 맥주도, 몇 년 만에 우연히 거리서 만난 친구와 미친 듯 마셨던 막걸리도(이 친구는 몇 년 뒤 내 남자 친구가 되었다), 술값이 물값보다 싸다며 물 대신 마셔대던 와인도, 갓 성인이 되어 뭣도 모른 채 마셔대던 보드카도 비록 그다음 날엔 깨질듯한 머리와 오바이트와 미친 숙취를 동반했을지라도 멈출 수 없는 낭만이 있었다. 변한 건 나의 마음일 뿐이다. 이제 더 이상 숙취로 머리 아프고 싶지 않고 들뜨고 싶지 않다. 힘들 땐 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힘듦을 지나가고 싶고 밤새어 술을 마시며 우정을 나누기엔, 술에 취해 끝없는 말들을 이어갈 체력이 없다. 한때는 와인이 좋고 한때는 막걸리가 좋고 한때는 맥주가 좋듯이 지금은 술의 낭만보다 다음날의 괴로움을 맞이하지 않는 아침이 좋을 뿐이다.
그래도 온전히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직도 술을 마신다. 회식 때도 마시고,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났을 때도 마시고, 가족들과도 마신다. 맛있는 술은 여전히 있고, 술이 당기는 날도 있다.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술의 엄청난 능력에 기대 어색한 사람들과 어색한 술을 마시기도 한다. 다만 예전처럼 많이 마시지 않을 뿐이고, 술을 좋아하냐 물으면 망설이게 됐을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한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잔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선뜻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는데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 29살 지금의 술에 대한 생각을 적으려니 나와 함께 술로 시간을 보낸 가까운 사람들을 배신하는, 혹은 술을 배신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한 때는 술이 즐거움이 되고 위로가 되었는데. 혹은 아직 인생의 쓴맛을 덜 맛봐서 술의 위로를 외면하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쓰자마자 술이 생각날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니까 확실하지 않지만 변한 내 마음을 글로 고백한다. 내가 아닌 새로운 사람이 내 자리를 대신할 테고, 나는 아주 가끔 나오는 객기로 또 함께 술과 밤을 지새울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여전히 술을 사랑하는 친구들의 낭만을 응원하고 그 시간들을 애정 한다. 또 술로 하루하루 구해져 가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술과 함께하는 밤에 무수히 쌓여가는 이야기들이 삶에서의 재미난 것들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지 않는다. 글을 쓰는 내내 한참을 술과 술을 마셨던 그때를 떠올리니 이 글을 쓰는 지금 아주 달달한 모스카토 한 잔이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