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 왕실, 상비약, 판소리, 대영박물관으로 이어지는 부채 스토리
단오와 연결되는 부채 이야기
우리는 늘 명절하면 설날과 추석을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명절만큼 중요한 날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단오다. 1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기도 하며, 모내기를 끝내고 전국적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날이 단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단오가 부채와 연결이 있다는 것.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길래 단오와 부채가 엮인 것일까?
일반적으로 단오는 창포물에 머리 감는 날 정도로 생각한다. 물론 창포물에 머리를 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날은 약간 선물을 하는 날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하듯이 왕이 신하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부채였다. 아직 그렇게 덥지도 않은 상태. 그렇다면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목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먼지 같은 오물을 날려주고, 청정하게 만들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재앙, 병을 몰고 오는 액운이나 병귀 같은 것도 쫓아버릴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역병을 쫓는 부채라는 뜻으로 피할 벽자와 병온, 부채선 자를 써서 벽온선(僻瘟扇)이라고도 불렀다. 한마디로 염병을 쫓아버리는 부채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왕실에서는 이렇게 주는 부채를 단오진선이라고 불렀고,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진상하라고 명령하였으며, 이렇게 받은 부채를 단오사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재상을 비롯한 신하게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단오진선은 조세의 일종으로 진상하지 않거나 조잡할 경우 문책하였으며, 천재지변 같은 재난 시에는 경감하였고 필요에 따라 증가하기도 하였다.
부채에 비상약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부채에 비상약도 있었다는 것이다. 왕실의 내의원에서 부채의 끝에 단추 모양의 장신구를 매달아 준 것. 이 장신구를 옥추단이라고 하는데, 부채를 휴대하고 있다가 긴급할 때 사용되는 약이 있었다. 즉 응급처치약이 부채의 옥추단 안에 넣어놨던 것이다. 임금은 단순히 부채를 하사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구급약까지 챙기면서 전달한 것이다.
부채의 8 덕
옛 선조들은 부채사랑은 옛 문헌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바로 부채의 8가지 덕이라는 내용이다.
첫째 시원한 바람을 내고
둘째 모기나 파리를 쫓아 주고,
셋째 곡식이나 음식이 담긴 그릇을 덮고
넷째는 불을 지필 때 바람을 일으켜 불을 붙여주고
다섯째 땅바닥에 앉을 때 깔고 앉고,
여섯째 길을 다닐 때 햇빛을 가리고,
일곱째 비를 막아주며,
여덟째 머리에 물건을 일 때 똬리 대신 사용했다
라는 내용이다. 8가지 덕을 가진 부채라고 8덕선 이라고도 불렀다.
판소리에서 부채를 꼭 사용하는 이유
부채에는 숨겨진 기능이 또 한 가지 있다. 판소리의 소리꾼들이 항상 이 부채를 들고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궁금했다. 폼으로 부채를 들고 다니는 것인지, 또는 단순히 더워서인지. 그런데 판소리를 잘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바로 모든 도구로 변신한다는 것이다.
적벽가’에선 소리꾼이 부채를 활인 것처럼 들고 쏘고, ‘흥부가’에서는 놀부가 흥부를 때리는 몽둥이로 , 박을 탈 때 톱질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춘향가’의 부채는 춘향과 몽룡의 사랑 편지가 변신한 이후에 이몽룡의 마패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청가에서는 심봉사의 지팡이부터 바다의 파도까지 부채로 표현합니다. 자그마한 부채가 무한한 상상력을 표현하는 그야말로 만능소품이 되는 것이다.
부채에도 명인이 있다.
국가 무형유산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 명인님이다. 김동식 명인님은 고종 때 합죽선을 진상할 만큼 기술이 뛰어났던 외조부 라학천 명인님의 손자이시고 현재 아드님까지 5대째 부채만을 만들고 계신 국내 최고의 부채장인이다.
대나무를 자르고 쪼개고 깎아 부챗살을 만들고, 거기에 인두로 무늬를 새긴 다음, 한지나 비단으로 만든 선면을 부채에 발라, 부채 목 묶기를 끝없이 반복하면 대나무를 합쳐 만든 부채 즉, 합죽선이 완성된다. 일반적인 부채는 사십 개의 대나무를 합쳐만든 것에 비해 김동식 명인의 부채는 76조각의 얇은 대나무살을 붙여 만든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76조각의 대나무살이 합쳐졌을 때 부채의 두께가 2.9cm밖에 안될 정도로 대나무를 아주 얇게 잘라 붙여주는 것이 누구도 따라 하기 어려운 가장 고도의 기술. 140~150번의 과정을 거쳐야 부채하나가 완성된다. 세세하게 따져보면 수만 번의 손길이 닿아야 비로소 하나의 합죽선이 완성되게 되는 것이다.
60년간 묵묵히 부채를 만드신 김동식 선자장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신을 위한 부채질이 '시원한 풍류'라면, 타인을 위한 부채질은 '따뜻한 배려'입니다."약간의 수고로움으로 최고의 멋스러움을 누리는 것이 바로 부채의 미학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드는 것은 단지 부채가 아니라, '낭만'이라는 이름의 바람과 그리움입니다”.
어릴 적 여름에 엄마가 부쳐주시는 부채질 생각나면서 굉장히 뭉클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채의 종류
공작이나 꿩과 같은 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인 우선(羽扇), 단선은 고대부터 사용한 둥근 모양의 부채다.
문양을 앞에 붙이면 이름이 완성되는데요 태극모양이 들어가 있는 태극선, 연잎 모양의 연엽선, 오동잎 모양의 오엽선, 파초의 잎처럼 생긴 파초선 등이 있다.
그리고 부채인 듯 부채 아닌 부채 같은 부채도 있는데요. 별선이라고 해서 바람을 일으켜 열을 식히는 용도 이외에 다른 용도로 쓰이는 부채를 말합니다. 그 종류도 다양한데요. 햇볕을 가릴 때 쓰는 윤선, 얼굴을 가리는 차면선, 맹세의 증표로 쓰는 합심선,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쓰는 무선, 혼례 때 얼굴을 가리는 혼선, 궁중에서 공주가 혼례 때 얼굴 가리개로 쓴 진주선 등이 있다.
이런 부채들 어디 가면 볼 수 있나?
영국 런던이다. 바로 대영박물관에 가시면 무려 5개의 한국 전통 부채를 관람하실 수 있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나주산 부채는 명성황후 주치의였던 벙커 애니 엘러스(여·Bunker Annie Ellers·1860-1938)가 1894년 박물관에 기증한 태극선(太極扇), 까치선(鵲扇), 단선(團扇)과 일본인 오기타 에스조(Ogita Etsuzo·荻田悦造)가 기증한 곡두선(曲頭扇) 등 총 5점의 전통부채 감상이 가능하다.
영국에 최초로 한국의 부채를 기증한 벙커 애니 엘러스는 미국 보스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온 첫 번째 여성의료 선교사다. 초기 제중원 부녀과에서 의료 선교사로 일하다 명성황후의 시의가 되면서 황실의 귀한 소장품들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곡두선은 일제강점기 총독 관방 총무국장을 지낸 일본인 오기타 에스조가 1910년 영국에서 열린 영국-일본 전시회 때 한국과 일본 물품을 대영박물관에 기증할 때 함께 전달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국내에서도 찾기 어려운 희귀한 전통부채가 5점이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외국에 가서 봐야 한다는 것. 지금이라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