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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선 Oct 24. 2024

노벨문학상 한강 작가로 환생한 조선의 여류 작가이야기

너무나도 슬펐던 조선의 여류 시인 이옥봉 스토리

최근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화제다. 덕분에 침체되었던 서점가와 도서관에도 활기가 넘치고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 구매를 하였으나 거의 열흘 만에 배송이 될 정도로 밀려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한강 작가의 책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인 셈. 그래서 최근에는 한강 작가의 대표작인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를 한시적으로 편의점에서도 판다고 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실은 한국만의 기쁨이 아니다. 바로 대한민국을 넘어 121명의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 여성으로는 18번째, 거기에 아시아 여성으로는 최초의 수상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강 작가의 수상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스웨덴, 나아가 노르웨이까지도 큰 이슈가 되고 있다.

바로 오슬로에 위치한 미래 도서관에서는 100년 후 기릴만한 한 세기의 작가로 한강 작가를 선정, 2114년에 공개될 것으로 타입캡슐에 그녀의 작품이 넣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여인이 가진 문학적 DNA

그렇다면 한국의 여인에게는 어떤 DNA가 있길래 이러한 노벨상 수상이 가능했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의 경우 심신을 달련하고 공동체 정신을 배양하는 문화가 있었지만 여성은 상황이 달랐다.


늘 차별의 대상이었고, 사회가 원했던 여성의 모습은 온순하며 시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모습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남존여비, 칠거지악 등의 사상이 지배적이었으며, 결혼을 하기 전에는 온순한 딸로,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좋은 아내이자 아이들의 현명한 어머니로 역할을 하는 역할이었다. 또한 신분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모의 신분을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혼인한 여성은 친정에 가고 싶어도 아무 때나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글을 짓거나 하면 쫓겨나기도

그래서 글을 알고 시를 짓는 여인이 드물었고, 어쩌다 글을 쓰는 여인의 경우, 결혼을 할 때 시를 짓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야만 했다. 만약에 이를 어길 시에는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억눌려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16세기 조선은 한국 문학사에서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적 전성이기 오게 된다.


우주와 인성의 근본을 탐구하는 성리학이 꽃피며 다양한 문물이 흥성한 시기였고 여성의 문학 활동이나 처신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유연한 시기였기 때문에 정실부인을 비롯한 첩의 자식인 서녀 출신 여성도 문화계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을 대표한 4명의 여류문인도 16세기 성리학이 꽃피우는 시기에 등장하게 된다

사진출처 교보문고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 문인 4인

바로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이옥봉 이렇게 네 명의 여류 문인을 대표적으로 소개할 수 있다. 신사임당 같은 경우에는 시와 그림·글씨에 모두 능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만능 엔터테이너라고 볼 수 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시죠? 신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라는 이름이다.(특이하게 필자와 이름이 같아 덕분에 신사임당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신사임당은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감수성이 탁월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포도, 풀, 벌레, 산수(山水) 등을 잘 그려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등 아름다운 작품을 남겼다. 또한, 효심이 깊어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쓴 시들이 지금까지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신사임당의 시 <어머니 그리워>
산 첩첩 내 고향 천 리건만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 위로 흩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는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 길 다시 밟아 가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할꼬


황진이와 허난설현

황진이는 개경의 기생으로 조선의 최고 여류시인으로 뽑힌다. 뛰어난 재능으로 여러 걸작 시와 시조들을 남겼는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라는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같은 시조들이 유명하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출제된 바가 있다.


허균의 누나였던 허난설현 역시 천재였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한 그녀는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한 인물로 유명하다.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는데,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 많은 작품을 남긴 인물이다. 그녀가 알려지게 된 것은 남동생 허균이 그녀의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한 것. 그러면서 그녀는 명성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너무나도 슬픈 이옥봉 스토리

슬프고 슬픈 스토리도 있다. 충청도에서 왕족의 후예로 태어난 이옥봉의 스토리다. 당시 이옥봉의 아버지는 옥천의 군수. 그리고 제법 문학적 명성이 있던 아버지와 어렸을 때부터 놀이하듯 시를 주고받았던 인물이다.


옥봉은 자라면서 조금씩 천재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자 아버지는 딸의 시 공부를 위한 책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는데, 어엿한 성인이 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시풍을 갖추게 되었고 장안의 명사들과 어울리며 뛰어난 시를 읊어 유명인사가 된다.


몽혼(夢魂): 꿈속의 영혼 그대를 찾아 간다면
이 옥봉
근래안부문여하 (近來安否問如何)
월도사창첩한다 (月到紗窓妾恨多)
약사몽혼행유적 (若使夢魂行有跡)
문전석로반성사  (門前石路半成紗)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달 비친 비단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꿈속의 내 영혼이 자취를 남긴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 .


이렇게 천부적으로 글을 잘 짓고 자존감이 강하다 보니 당시에 이옥봉은 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글쓰기로 외부활동이 많았던 옥봉을 떠나게 된다. 그 후 이옥봉은 이별의 한이 깊어 병이 걸리게 되는데 상사병이 걸리게 되었다. 그런데 결국 상사병은 여인의 한으로 이어져 끝내 세상을 떠나게 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려던 찰나에 옥봉의 이야기가 먼 중국에서 다시 알려지게 되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이옥봉의 남편이었던 조원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조희일(趙希逸)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의 원로대신과 인사를 하던 중 그가 조원의 아들이라는 말에 명나라 사신이 혹시 이옥봉을 아냐고 물어보면서 책장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 보여준 것이다.


조희일은 한국에도 없던 의붓어머니의 책이 중국에 있었으니 깜짝 놀랐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뭐냐고 물었더니 명나라 원로가 40여 년 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어렵게 꺼낸다.

바로 40여 년 전 어느 날 명나라 바다에 시체 한구가 파도에 밀려왔는데, 그 시신을 보니 종이로 수백 겹을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성의 시신이었던 것이다.


노끈을 잘라내고 감싸져 있던 종이를 벗겨냈더니 안쪽의 종이에는 빈틈없이 작자 미상의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고, 자세히 보니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海東朝鮮國 承旨 趙瑗之妾 李玉峰)'이라고 쓰여 있었다는 것,


남편에게 돌아가지 못한 서러움 때문에 옥봉은 자신이 쓴 시 수백 장을 온몸에 감고 바다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와 함께 죽음을 택했던 서글픈 이야기는 그녀가 남긴 훌륭한 작품들과 함께 후손들에 의해 '옥봉집(玉峰集)'으로 출간되면서 사후 먼 해외로부터 그 가치와 존재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비록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지만 ‘여인’이기 이전에 고귀한 사람이자 아름다운 예술가로 오랫동안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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