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헤엄치는 물방울
<리버보이(팀 보울러)를 읽고>
평생 나와 관련 없을 두 가지는 그림과 수영이다. 특별히 트라우마는 없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없다거나 맥주병인 것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아내고픈 욕심은 항상 있었다. 첫 장에 소설 속에 뛰어들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세찬 물줄기에 깊이 잠기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사실 독후감을 쓰는 지금껏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다. 흑백의 활자만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 강물처럼 유려한 필체를 따라 바다를 향하는 가장 멋진 방법은 바로 이 소설, 『리버보이』를 읽는 것이다.
수영을 좋아하는 열다섯 소녀, 제스가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가족 휴가를 떠난다. 화백이셨던 제스의 할아버지께서는 몸이 편찮으셨음에도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생의 역작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신비로운 강의 풍경화에는 할아버지의 그림 중 처음으로 『리버보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고집 센 할아버지 탓에 마음이 싱숭생숭한 제스의 앞에 그림 제목에 걸맞은 소년이 나타난다. 그녀는 신비로운 강줄기에 몸을 맡기며 특별한 여름방학을 보낸다.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시에서도 노래에서도 수없이 들어왔던 문장이 소설 속에서 새로이 태어난다. 익숙함이 낯설어질 때 훌륭한 창작물이 된다. 상실에는 슬픔이 따른다는 명제 역시 익숙하다. 우리는 모두 살면서 무언가를 잃는다. 제스가 겪어낸 건강한 슬픔을 읽고 나자 내가 겪어낸 상실이 새롭게 떠오른다.
실명을 진단받은 스물아홉의 여름, 기나긴 장마에 이은 태풍으로 몇 달째 비가 그치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그림을 못 그리고, 헤엄을 못 치며 차근차근 멀어지던 시력과 작별할 시간이 왔다. 오랜 여름비에 무참히 무너져서는 전염병 탓에 멈춘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방 안에만 있었건만, 어쩌다 시각장애인의 언어인 점자를 배우고, 음성으로 컴퓨터를 이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던가? 이제는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나조차 흐리기만 했던 그 계기가 씻어낸 듯 선명해진다.
이쯤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언급하련다. 제스의 할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요양병원을 가고 싶어 하실 때의 플롯이다. 제스는 삶에 대한 의지를 놓아버린 할아버지를 두고 보지 않는다. 그의 손에 붓을 쥐여준 채 거들어 주며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제스의 도움을 받았다고 완성한 그림이 다른 누구의 것이랴? 할아버지의 추억 속 풍경을 담았고, 할아버지의 얼굴을 담은 그림은 오롯이 할아버지의 그림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계룡산 밑자락이다. 어둠이 내리면 저 멀리 계곡에서 들리는 물소리마저 또렷해진다. 할아버지의 품 속에 누워 이불만 한 창문 너머 별들을 우러러본다. 그때만 해도 내 눈은 별빛을 담아 초롱초롱하기만 했다. 할아버지께서 이어 주시는 별자리에 담긴 이야기를 따라 꿈속으로 풍덩 뛰어들 수 있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아직은 추억보다 미래에 마음을 두던, 나의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던 고3의 여름이었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에 오래도록 요양병원에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별자리를 잇는 이야기가 가늘어지고 밤하늘을 우러러볼 일도 사라져 갔다. 할아버지가 별들을 이어주셨던 그 방에서 실명을 하고 깊이 잠겨 지내다 보니 나 역시 아주 작은 점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리고 내가 아주 작은 점이라면 무언가와 이어야 이야기가 되고 그림이 될 것이었다. 나는 1년 여 동안 열지 안았던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비가 와도 별은 지지 않는다. 별은 홀로 빛나지 않는다. 세상과 나를 잇기 위해서 할아버지와 잠들던 방을 나선다. 지역의 복지관으로, 지금 일하는 직장으로 이어지는 그림이 근사하다. 제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할아버지의 그림처럼 할아버지의 덕에 잠들던 나의 이부자리처럼, 다른 누구의 도움으로 이어갈 삶이더라도 그 삶은 자신의 것이다. 처음에는 작은 돌기들에 불과했던 올록볼록한 점들은 나를 때리던 빗줄기가 회기 한 듯 손끝을 간질였다. 마침내 점으로 된 글자는 내 손으로 이어야 하는 별자리가 된다. 어둠 속에 빛나던 별들을 손끝으로 쓸어내며 여름에 더욱 선명한 은하수를 헤엄친다. 밤하늘에 박힌 별자리를 읽듯 나는 새로운 언어 위를 헤엄쳐 목적지를 향한다.
작금의 목적지는 ‘경주’다. 작년에 점역교정 사라는 점자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고, 올해에는 지방장애인 기능경기대회 점역 부문에서 1등을 거머쥐었다. 지방대회에서 우승한 이들에게 전국대회에 출전할 자격이 주어진다. 올해 9월 말에 있을 전국장애인 기능경기대회의 개최지가 바로 경주다. 사전조사 차 인터넷에 ‘경주’를 검색하였다. 경주에서 열리는 공모전을 발견한 것도, 대상 도서 중 『리버보이』에 관심이 생긴 것도 우연이었다. 다만 책을 읽고 점자로 독후감을 작성하는 것만큼은 나의 몸짓이다. 그 덕에 실명했어도 내 인생을 담은 강의 풍경을 그릴 수 있었고, 그 강을 헤엄칠 수 있었다. 내가 몸담은 강의 발원지에도, 이 강 끝에 다다를 바다에도 경주가 있다.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그리고 하나로 모일 바다의 발원지는 각기 다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제스는 할아버지의 유골을 강에 뿌리고 폭포로 뛰어든다. 내가 점자로 읽는 은하수의 발원지, 그 밑바탕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백지뿐인 작은 붓으로 그린 점에서 그림이 완성되듯 어둠뿐인 시선에서 아주 작은 물방울이 별자리가 되고 은하수가 된다. 상실에 흘렸던 눈물과 정수리를 때려댔던 여름비는 나의 발원지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제 은하수를 따라 온몸 뻐근하도록 팔딱거리며 앞으로 앞으로 헤엄칠 시간이다. 그리고 다다를 경주라는 바다에서 다시 만날 물방울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눠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