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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r 06. 2024

옛날엔 줘도 안 먹었는데

-100

'커피에 찍어먹는' 것으로 유명한 오래된 크래커 제품이 있다. 나는 이 제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달지도 짜지도 맵지도 않은 그 맛이 퍽 밍숭밍숭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커피에 찍어먹으면 맛있다지만 커피에 덜 담그면 커피가 덜 배어 찍으나마나한 맛이 나고 너무 오래 담그면 눅눅해진 크래커가 커피 속으로 퐁당 빠져 남은 커피 맛을 다 망쳐놓는 탓이 컸다. 그래서 그 크래커는 내게는 '왜 돈 주고 저런 걸 사 먹는지 이해가 안 가는' 몇 가지 주전부리 중 하나로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게 아마 설을 앞두고 며칠간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며 먹을 것들을 사러 집 근처 마트에 갔을 때였을 것이다. 행사 상품이라고 내놓은 과자들 중에 그 크래커의 '신상 맛'이 한 종류 나와 있었다. 치즈 케이크 맛이라고 한다. 여기서 약간 호기심이 돌았다. 그리고 이 크래커는 그 양에 비해서는 가격이 썩 비싸지 않은 물건이어서 여섯 개 들이 소포장이 열 다섯 봉지나 들어있는 큰 박스 하나에 고작 3천 원이 조금 넘었다. 싼 맛에, 사가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언제나 오후쯤이 되면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면서도 입이 심심하다는 생각에 늘 괴롭던 터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 크래커 한 봉지 정도면 적당히 저녁을 보낼 수 있겠지. 그런 얄팍한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언제나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익히 아는 그 맛'을 예상하고 한 봉지 뜯어 하나 집어먹어본 그 크래커는 뜻밖에 맛있었다. 어라. 이거 꽤 물건이네.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순식간에 여섯 조각이 든 한 봉지를 다 먹어 없앴다. 잠깐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일을 좀 하다 보니 슬그머니 하나가 더 땡겨서 또 한 봉지를 뜯어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그런 식으로 대충 하루에 한 봉지, 많아야 두 봉지 정도 먹으면 많이 먹는 거고 그러니 이것 한 박스면 일주일 정도 간식거리는 넉넉하게 되겠지 하는 얄팍한 생각에서 샀던 크래커 한 박스는 정확히 사흘 만에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거도 모자라 나는 요즘 연일 이틀에 한 박스 꼴로 그 크래커를 해치우고 있는 중이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두 박스씩을 꼭꼭 사고, 마트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들러서 한 박스씩 사다 쟁이고 있다. 어제만 해도 다른 용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그 크래커 한 박스를 사러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마트까지 긴히 걸어갔다 올 정도로. 이렇게 홀릭한 간식거리가 얼마만인지, 좀 당혹스럽기까지 할 정도다.


그 크래커 제품군 가운데서도 이 제품이 유독 맛있게, 잘 뽑혀져 나온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꼭 그만큼이나 내 입맛도 변했다는 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육회 비빔밥 먹으러 갔다가 육회는 뒷전이고 고사리나물 맛에 반하고 나온 이야기를 불과 며칠 전에 썼는데, 그런 것처럼. 예전엔 입에도 못 대던 수정과를 요즘은 없어서 못 먹는 것처럼.


내심 이 크래커를 제법 좋아했으면서도 내가 너무 질색을 하고 싫어해서 두어 번 집어보다가 번번이 그냥 놓아버리던 그를 생각한다. 내가 조금만 빨리 철이 들었더라면 이 크래커도 꽤나 자주 사 먹었을 텐데. 나는 이렇게 나이가, 혹은 철이 들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거기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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