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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23. 2024

그릇 이렇게 많이 필요 없다니까

-178

뭘 하든 예쁘고 보기 좋은 것을 좋아했던 그는 그릇 욕심도 꽤 많은 편이었다.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여주까지 원정을 가서 그곳의 도자기 아울렛에서 싸게 나온 예쁜 그릇들을 세트로 사다 날랐다.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늘 산 무슨 그릇은 어때서 마음에 들었고 다음번엔 이러저러한 스타일의 그릇이 좀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싫증도 내지 않고 떠들면서 돌아왔다. 싱크대 상부장이 미어지게 들어앉아있는 온갖 종류의 그릇들은 다 그 시기의 유산들이다.


혼자 남은 지 2년째, 그가 그렇게나 애살스레 사다 나른 그릇들은 거의 대부분이 개점휴업 상태다. 나는 그와는 달라서 매일 똑같은 그릇에 밥 담고 국 담아서 밥을 먹어도 별로 질리는 줄을 모른다. 포크는 파스타 먹을 때나 가끔 쓰고, 숟가락은 늘 쓰는 도자기 숟가락이나 맨날 쓸 뿐 그가 세트까지 맞춰서 사다 놓은 금속제 숟가락 젓가락은 거의 2년째 손도 대지 않은 채 수저통에 꽂혀 있다. 싱크대 상부장 안에는 그가 매우 마음에 들어 하던 일본식 면기도 한 세트 들어 있지만 나는 그 그릇들을 언제 보고 안 봤는지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종류별로 사다 놓은 온갖 예쁜 컵도, 크기가 다양한 접시도, 여름에 냉면이나 비빔면을 담아 먹으면 곱절은 시원해질 것 같은 유리그릇도 죄다 정리장 속에 처박힌 채 놀고 있다. 내게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끔 그렇게 내게서 잊혀진 채 쌓여있는 그릇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좀 꺼내서 이렇게 저렇게 써보려고 하다가도, 남들 다 크는 동안 크지도 못한 내 키에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그릇 하나 꺼내보려고 낑낑대다가 제풀에 소갈머리가 나서 됐다고 돌아선 적도 있고, 그렇게 하나 꺼낸 그릇을 밥 한 끼 먹고 나서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게 귀찮았던 적도 있고, 어차피 나 혼자 차려 나 혼자 먹을 밥인데 어디에 담아먹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 싶어서 그냥 늘 두던 자리에 나와 있는 쓰는 그릇을 집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가 그렇게 애살스레 장만해 놓은 그릇들은 2년째 거의 바깥 구경을 하지 못한 채 상부장 속에서 잠만 자고 있다.


이 집에 천년만년 살 순 없고 언젠가 이사를 가게 되면 저 그릇들은 어떡하나. 그런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나는 저 그릇들을 새 집으로 싸들고 가서 그가 했던 대로 솜씨 좋게 잘 포개서 욱여넣을 자신이 없고, 그렇다고 그가 그렇게나 소중하게 골라놓은 것들을 싹싹 쓸어다 내다 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게, 나 같은 뒷손 없는 인간의 뭘 믿고 저 태산 같은 그릇들만 남겨주고 떠났는지. 참 대책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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