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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28. 2024

이면지라도 괜찮아

-214

요즘 올라오는 빈도가 줄어든 이야기 중에 펜글씨 이야기가 있다. 뭐 아직도 하루에 30분씩 짬을 내 열심히, 하루에 다섯 장씩을 쓰고 있다.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도 글씨는 어째 좀 나아지는 듯 보이기도 하다가도 마음만 급해지면 도로 예전의 그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가 귀신같이 튀어나와 사람을 절망하게 한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내 펜글씨 교본은 그냥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적당한 서식에 좋은 노래 가사나 시구, 문장 등을 연한 회색으로 타이핑해서 프린터로 출력한 후 그 위에 글씨를 쓰는 것이다. 효과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고 다음엔 또 무슨 좋은 문장을 써볼까를 고민하며 내가 기억하는 각종 좋은 문장과 가사들을 되짚어 생각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다만 이렇게 하루에 다섯 장씩, 일주일이면 서른다섯 장의 종이를 소모하다 보니 집에 재놓은 A4 용지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좀 있긴 하다.  근처 문방구에서 사는 건 비싸고, 마트에서 사 오기에는 무겁고,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기에는 애매하게 배송비가 붙기 때문에 최대한 종이가 떨어질 무렵의 타이밍을 잘 맞춰서 마트에서 같이 주문해야 한다는 점이 포인트다.


그렇게 한번 펜글씨를 쓰고 난 종이는 그냥 재활용 쓰레기로 버렸다. 이면지로 쓸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꾹꾹 눌러쓰는 탓에 요철이 생긴 종이를 프린터에 걸었다가 용지가 걸리기라도 해서 그것 때문에 애를 먹느니 그냥 한 번만 쓰는 게 낫겠다 싶은 얄팍한 심리가 있었다. 그런 식의 좋은 핑곗거리도 장만했지만 그래도 한 번 쓴 종이를 고스란히 재활용쓰레기로 내놓는 뒤통수는 언제나 따끔따끔했다. 내 글씨가 무슨 천하 명필인 김정희나 한석봉도 아닌데, 아무리 봐도 한 번 쓴 종이 그냥 버리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며칠 전 책상을 정리하다가 이면지로 씀직한 종이를 한 묶음 발견했다. 그 종이를 펜글씨 교본을 출력하는 데 사용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기분으로 전날 글씨를 쓴 종이를 뒤집어 프린터에 걸어 보았다. 별문제 없이 잘만 출력돼서 나오는 걸 보고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그러니까, 두 번씩 쓸 수 있는 종이를 그간 몇 권이나 한 번만 쓰고 고스란히 버린 셈이었다. 아, 돈 아까워. 그렇게 잠시 울상을 하다가, 또 내 특기인 적당히 얼버무리기를 시전해 본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면지로 써도 별 문제없다는 걸 알았으니 지금부터는 종이 낭비가 반으로 줄어들 게 아니겠냐고. 뭐든 늦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법이라고. 암만.


그렇게 양면을 빼곡하게 쓴 종이는 버리는 손이 부끄럽지 않아서, 그것이 일단 좋다. 뭐 이런 식으로 조금씩 야무져져 가는 것이겠지. 그냥 그렇게 생각해 버리기로 한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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