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그의 책상을 지키고 있던 국화들이 한두 송이씩 시들어가서, 다음 꽃을 주문했다. 이번 꽃 역시 가장 만만하고, 그러면서도 돈값 확실히 해주는 장미다. 이번 장미는 크림색과 코랄 핑크색을 반반 섞어서 한 단이다. 또 이렇게 꽂아놓고 보니 제법 로맨틱한 배색이어서 오며 가며 한참이나 꽃을 쳐다보곤 한다.
장미는 이미 몇 번이나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 대로 대단히 많은 장점이 있는 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만큼 '뻔한' 꽃이기도 하다. 아무리 꽃이니 식물이니와 담을 쌓고 산다고 해도 장미가 어떻게 생긴 꽃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며 장미 향이 어떤 향인가를 모르는 사람도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 배달되어 온 장미의 줄기를 다듬어 꽃병에 꽂으면 그 풍성함에 마음이 흐뭇하기는 할지언정 이 장미가 피면 어떤 모양이 될 것인가에 대한 설레임은 그리 크지는 않다. 장미는 봉오리만 봐도 어떤 꽃이 필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꽃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의 책상 서랍에든 스카치테이프를 좀 꺼내려고 하다가 그만 떨어뜨렸고 그 테이프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가 잠깐 의아해졌다. 꽃병에 꽂혀있는 장미 중에 못 보던 녀석이 하나 있었다. 이게 뭔가 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니, 코랄핑크색 장미 한 송이의 봉오리 속에 접혀있다가 반쯤 펼쳐진 꽃잎에 마치 새치라도 난 것처럼 흰 무늬가 들어간 꽃잎이 섞여 있었다. 그동안 꽤 다종다양한 장미를 사보았고 그중엔 투톤컬러인 장미도 더러 있었지만 이렇게 숨어있던 꽃잎 한 두장에만 다른 색깔이 들어가 있는 장미는 또 처음이어서, 나는 정작 용건도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그 장미를 구경하고 있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고, 전문을 외우는 몇 안 되는 시 중의 하나인 '목마와 숙녀'에서 시인 박인환은 노래한 바 있다. 하루하루 사는 매일매일은 대개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으며, 그래서 살아보나 마나 거기서 거기까지인 듯이 그렇게 여겨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일이 앞으로 일어날 확률은 그지없이 희박하고, 반대로 늘 일어나던 일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을 확률도 그만큼이나 낮다. 어차피 그런 거라면 굳이 애써 아등바등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도 없진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러나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이 장미 한 송이를 보고 생각하게 된다. 봉오리로만 봐서는 그지없이 평범한 분홍색 장미였던 것이, 반쯤 피고 보니 그 속에 이런 꽃잎을 감추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그지없이 많은 빅 데이터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지라도, 어쩌면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뭔가 깜짝 놀랄 만큼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조금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보라고. 생은 언제나 예측불허이며 그래서 그 의미를 갖는다는 오래된 순정만화에 나오는 유명한 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