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갓지다’라는 단어는 ‘한가하고 조용하다’란 뜻을 담고 있다.
퇴직하여 한가로이 집에서 지낼 때였다. 날마다 울리던 핸드폰이 여간해서는 울리지 않는다. 그간 얄팍하게 가지고 있던 권력도, 어떠한 권위마저 사라진 내게 이젠 아무도 접촉하지 않는다. 가끔 지인의 안부 전화도 내가 먼저 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세상은 냉정하다. 권력의 끈이 떨어진 냄새는 기막히게 잘 맡는다. 정해진 일정도, 아무런 책임도 없는 조용한 아침이 오면 그냥 산책하러 나간다.
동네 호숫가 주변을 그냥 걷는다. 호수의 물결처럼 조용한 오후. 회색빛 도심 속에서 나만의 작은 공간과 여유를 찾는다.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동네 도서관에도 가본다. 몇 시간이고 뭉개고 있어도 뭐라고 하지 않는 나만의 카페도 발견했다. 즐겨 가는 목욕탕을 찾아 또 하루의 긴장을 푼다. 알게 모르게 쌓이던 긴장도 이제는 생기지도 않는데 그냥 습관처럼 목욕한다.
모처럼 한갓진 오후의 연속이다. 차 한잔의 시간, 책 한 권의 여유, 호젓이 영화 한 편을 감상하면서 새롭게 느껴지는 감성들. 다른 길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오래된 짐을 일단 내려놓고 나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느긋하게 숨을 고르는 순간들. 또 다른 안정감이다. 물론 앞으로 감내해야 할 일도 생기겠지만, 우선 퇴직은 무사히 했으니 기본 임무는 마쳤다는 안도감이 든다.
생각보다 더 한갓지다. 직위와 직급이 높았던 이들은 퇴직하면 그 외로움과 허전함은 더 클 것 같다. 어디서나 주목받고 대접받는 문화와 환경에 적응하다가 갑자기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고 추락하는 일상을 만나게 되면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을 터. 현직에 있을 때 퇴직 후 재취업 자리를 미리 찾으려고 그리 애쓰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두 번째 직장을 퇴직할 당시까지 별다른 취업 준비를 하지 않았다. 취업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다. 준비해 오던 박사학위부터 받았다. 퇴직한 이후에 받았으니 빠른 것은 아니나, 늦은 것도 아니었다. 늦은 나이에 돈만 낭비하는 학위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건 옛날이야기다.
나이는 들어도 할 일은 많다. 박사 논문을 기반으로 『국가중요시설과 안티드론』책을 출간했다. 정부 기관이나 산업체 등에 근무 중인 비상계획관들에게 드론 공격에 대응하는 안티드론시스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덕분에 경찰청 등 몇 군데 강의도 했다. 어떤 이는 내 논문과 책을 참고하여 정부 과제나 박사학위 논문 쓰는데 도움받았다고 한다. 안티드론시스템을 연구하면서 초경량비행장치조종자 자격증(드론조종)도 땄다. 실기시험이 의외로 만만치가 않아서 실습장이 있는 경기도 이천까지 수차 왕복하면서 재수 끝에 간신히 합격하였다. 혹 관련 학계와 방산업체 등에 취업을 해볼까도 하였으나,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골프 프로선수였던 딸이 마침내 프로 입문 11년 만에 정규 투어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골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아『홀인원보다 행복한 어느 아빠의 이야기』수필집도 이어서 출간했다. 골프 수준이 보기플레이인 내가 기술적인 조언을 할 정도의 실력이 아니기에 프로선수 아빠의 이야기를 담았다. 갤러리 갔을 때 책을 잘 읽었다고 말해주는 독자를 만났을 때, 딸을 골프선수로 키우고 싶은 어떤 부모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주었을 때 작가로서 만족스러웠다. 몇 군데 골프 미디어에도 골프 칼럼을 1년 이상 연재도 했다. 한갓진 시간에 골프대회에 참가한 딸을 응원하기 위한 골프 갤러리도 마음껏 다녔다. 지금 딸은 은퇴하여 캐디를 했던 친동생과 함께 골프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퇴직할 즈음에 출간했던『50대, 나를 응원합니다』 수필집을 읽고 전화나 문자를 보내온 독자들의 격려는 퇴직 이후 알게 모르게 또 다른 나의 응원꾼이 되어 주었다. 퇴직하고 얼마 후 ‘군장병 독서코칭강사’에 지원하여 2년간 활동했다. 역사, 철학, 시, 소설, 과학, 자기 계발 등 분야별 6권의 선정된 책으로 지정해 주는 부대 장병들과 독서토론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미리 정독하고 파워포인터로 교재를 준비하였다. 아쉽게도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으로 화상 수업을 진행했다. 권당 2시간이 설정되어 있는데 진행 과정에서 보초 근무로 들락날락하는 장병도 있지만, 독서 탐구 열정이 뛰어난 일부 장병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도 발견했다. 나름 보람찬 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독서 코칭을 잘할 수 있는지 알아보던 중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독서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 강사는 동네 책방 주인이었다. 다독자이면서 자기가 읽어본 책만 판매하며 마음이 따뜻한 젊은 사람이었다. 책을 사러 갔다가 한 달에 한 번 그가 운영하는 북클럽 모임에도 나가게 되었다. 대부분 젊은이고 내가 가장 연장자였다. 자유로운 사고를 하고 활발하게 토의하는 그들이 매우 신선했다. 이후 책방 주인은 남편 따라 독일로 가버렸지만, 일부 인원들은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도 한 달에 1~2회 만나 북클럽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공통의 주제로 서로의 생각을 함께 나누며 토론을 해보는 것만으로 매우 의미 있는 성장의 시간이고 또 다른 즐거움이다.
코로나가 아직 한창일 때 퇴직하였기에 여행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다. 퇴직과 동시에 3개월 헬스장에 등록하고 다녀보았으나, 무리하게 운동해서인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야외 활동이 허용되는 테니스와 골프가 훨씬 재미있었다. 동네 테니스장 클럽에 가입하여 그들과 운동을 즐겼다. 땀 흘리는 재미가 너무 좋았다. 군 골프장 정회원인 나는 가끔 골프 라운드도 아내와 함께 나간다. 적당히 운동을 즐기다 보니 기분을 좋게 해주는 호르몬인 세로토닌, 도파민, 엔도르핀 때문인지 퇴직 후 흔히 찾아오는 우울증, 불안감은 없었다.
누구나 느끼지만 퇴직하면 좋은 것 가운데 하나는 더 이상 목표지향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승진이나 진급, 명예를 향해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제는 내가 하고픈 일을 찾아서 그 과정을 즐기며 만족하면 되고 설혹 만족하지 못하면 바로 때려치우면 된다. 누구에게도 책임 지울 일이 아니다. 되찾은 자유와 자율. 그것이 은퇴가 주는 최대의 선물이다.
퇴직 이후 내게 찾아온 이 한갓진 시간도 마침내 당분간 다시 정비하게 되었다. 중소기업에 입사하였기 때문이다. 동년배 회사 대표가 여유를 가지면서 회사 일을 도와주기를 부탁했다. 물론 회사가 번창할 수 있도록 애써 도와야 하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배려해 주니 고마웠다. 입사한 지 벌써 3년 차다. 그렇게 바쁘고 힘든 업무는 아니다. 다시 목표와 계획이 있는 일정을 유지한다. 그것은 때로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일하면서 삶의 품격에 대해 더 생각해 보고, 좀 더 여유를 찾으려 한다. 잠시나마 한껏 누렸던 독서와 운동 그리고 글쓰기 등 괜찮은 습관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 나갈 것이다.
앞으로 내게 다가올 미래가 또 어떻게 펼쳐질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갓진 인생의 오후에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일은 계속하고 싶다. 언제까지라고 나이를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노동이 주는 소중한 가치를 알기에.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까지. 이를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중요하리라.
남아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잘 안다.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실감한다는 80대 김훈 작가는 그의 최신작 『허송세월』에서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쬐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라고 말한다.
이젠 내게 남아있는 시간 속에서 더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에 대한 탐구 여행도 다시 해볼까 한다. 이제 거창한 목표 따위는 부질없고 의미 없다. 단지 일상에서 약간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그냥 누리고 싶다. 그런 허송세월을 맘껏 즐기고 싶다. 더 많은 여유와 평온한 순간을.
인생 중반기, 동네 호수의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한 오후.
나만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이 한갓진 오후의 멋진 발견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