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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윈드 Oct 22. 2022

2월의 어느 날 오후

2월의 어느 날 오후를 잠시 걸어봅니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부드러운데 바람 끝에는 차가움이 배어있습니다. 아직은 겨울인가 보네요. 세상은 여전히 갈색입니다.       


어느 담벼락에 남아있는 마른 덩굴들이 햇살을 받고 있습니다. 갈색으로 변한 마지막 잎새와 이리저리 뻗어가던 줄기들이 마치 그림 같습니다. 비록 이제는 다 말라버렸지만 그대로 남아 어떤 시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직 뿌리는 남아 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지에서 길게 뻗어 나온 때죽나무 열매의 껍질이 바람에 가늘게 떨리고 있습니다. 반쯤 남아있는 껍질에서 떠나간 잘 익은 씨앗은 어디에선가 겨울을 나고 있을 듯합니다. 이제 계절이 바뀌면 봄비를 맞으며 깨어나 파릇한 새싹을 틔우게 되겠지요.      


마른 숲에는 아직 남천의 붉은 열매가 밝은 적갈색으로 변한 잎 사이에서 붉게 붉게 반짝이고 있습니다. 지난가을에 붉게 익어가더니 한 겨울을 지내고 지금까지 남아있군요. 제법 많은 열매들이 겨울 햇살을 받으며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반짝이고 있네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남아 산책자를 반겨주니 기쁘지는 하지만 이제는 땅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건조한 계절을 지내고 있는 매화 가지는 뭔가 달라진 듯합니다. 물이 오른 듯한 초록색의 가지에 작은 꽃봉오리가 송알송알 맺혀있습니다. 자유롭게 뻗어나간 가지와 함께 흔들거리는 꽃봉오리들이 봄날을 기다리는 매화의 악보 같습니다. 왠지 지금은 단조 같지만 이제 꽃이 피어나면 장조로 바뀌어 가겠지요.       


꽃봉오리가 조금씩 벌어지며 겹겹이 싸인 꽃잎을 살짝살짝 보여줍니다. 연한 연둣빛이 감도는 꽃봉오리가 금방이라도 펑하고 터질 듯합니다. 이제 봄이 가까이 다가오는 듯합니다. 머지않아 꽃들이 활짝 피어나면 그제야 봄이 온 것일 듯합니다.       


매화는 벌써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며 꽃봉오리를 키우고 있네요.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것을 알게 되겠지만 계절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은 매화만이 아닐 듯합니다. 이제 매화가 피어나면 우리의 몸과 마음도 함께 깨어나게 될 듯합니다.       


하얀 매화가 맑은 향기를 날리며 피어나는 봄날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을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의 연주로 들어봅니다. 길게 늘어지는 피아노 소리와 부드러운 오케스트라의 멜로디처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계절은 변해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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