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의 흔적
프린스턴은 미국 독립전쟁의 전투 지로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미국 독립과 국가로서 기틀을 잡는데 크게 활약한 인물들이 배출됩니다. 이번 글에는 프린스턴의 기원과 프린스턴이 미국의 독립과 건국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볼까요?
프린스턴의 기원은 미국의 영국 식민지 시대인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린스턴이라는 이름은 왕자의 도시 즉, Princetown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왕자는 훗날의 윌리엄 3세가 된 영국의 윌리엄 왕자를 기념하여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린스턴이 미국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미국 독립전쟁 때였습니다. 워싱턴 장군의 대륙 군은 보스턴에 이어 뉴욕에서도 패하여 요새를 빼앗기고 펜실베이니아까지 후퇴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대륙 군은 한 번도 영국군을 전투에서 이겨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밑바닥에 이르렀고 전쟁에 대한 회의론의 팽배할 때였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어떻게든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적이 전혀 예상치 못할만한 게릴라 식의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1776년 12월 크리스마스 밤 워싱턴이 이끄는 혁명군은 쥐도새도 모르게 델라웨어 강을 건너갑니다. 이를 그 유명한 '워싱턴의 델라웨어강 도하'라고 부릅니다. 혁명군은 12월 26일 남부 뉴저지의 트렌턴을 급습하여 1,000여 명 포로로 사로잡는 큰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새해가 된 1월 2일은 북쪽에 위치한 애순 핑크 크리크에서 연이어 영국군을 격퇴하게 됩니다. 성난 영국군은 트렌턴을 다시 탈환하려고 진군해 왔지만, 워싱턴은 그 허를 찔러 오히려 북쪽에 있는 프린스턴 진격하였습니다. 드디어 역사적인 1777년 1월 3일 머서 장군이 이끄는 부대와 워싱턴의 지원부대가 프린스턴 전투에서 영국군의 후위 부대를 무찔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머서 장군이 전사하고 영국군은 오늘날 프린스턴 대학의 본관인 낫소 홀을 요새 삼아 항거를 했습니다. 그러나 대포로 무장한 워싱턴 군의 사정없는 포격으로 곧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대륙 군은 사이에 트렌턴 전투의 승리에 이어, 애순 핑크 크릭 전투, 프린스턴 전투까지 승리함으로써 불과 열흘 사이에 전세는 완전히 뒤집어지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오합지졸로 알려졌던 워싱턴의 군대가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게기가 되었고 그 이후 자원입대하는 인원들이 크게 늘게 되었다고 합니다. 프린스턴은 미국 독립 전쟁사에 중요한 전투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시간을 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776년 7월 4일, 13개 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결의 행사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미국 독립선언문에 각 지역을 대표하는 56명이 서명을 합니다. 이들은 오늘날 미국의 founding father 즉, 건국의 아버지로 대우하며 존경받는 인물들입니다. 이는 마치 한국의 3.1 운동 때의 민족대표 33명과 같은 존재라고 나 할까요? 독립선언문에는 뉴저지를 대표하는 두 명의 인사들이 프린스턴으로부터 내려와 참여하고 서명을 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리처드 스톡턴(Richare Stockton, 아래 초상화)과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입니다.
리처드 스톡턴은 뉴저지의 입법 가이며 변호사이며 아버지 존 스톡턴으로부터 프린스턴 지역 땅을 물려받은 부유한 유지였습니다. 그는 조지 워싱턴 장군의 측근으로 미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프린스턴 대학의 전신인 뉴저지 칼리지가 세워질 수 있도록 넓은 땅을 기부하고 대학의 발전을 위해 평생 헌신한 선구적 인물이었습니다. 리처드는 1766년 대서양을 건너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여행했는데 이때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명망이 높은 존 위더스푼 목사를 프린스턴의 총장으로 초빙을 하려고 갖은 애썼습니다. 처음에는 초빙을 거절했으나 계속되는 간청으로 위더스푼 목사는 결국 제의를 수락하였고 프린스턴 대학의 6대 총장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위더스푼 목사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과 세인트 앤드류 대학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개신교 목사였습니다. 그는 그 유명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상식 학파의 일원이었고 신학적으로는 종교 개혁주의자 존 녹스(John Knox)의 정신을 계승하는 장로교 목사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았고 학문적으로 가장 첨단을 걸었던 스코틀랜드로부터 위더스푼 총장의 부임은 미국 대학교육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기부제를 통해 대학의 재원을 마련하고 자신의 장서들을 대학 도서관에 기부하였습니다. 에든버러 대학과 같은 스코틀랜드의 대학에서 사용하는 과학, 지리 천문학의 연구 기자재를 들여와 교육에 활용하였고 자신은 철학, 수사학, 신학을 직접 강의하였습니다. 장로교 목사로서는 아직도 의 낫소 장로교회를 세웠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수로서 그가 배출해낸 제자 중에는 무려 37명의 판사와 12명의 대륙회 의원, 28명의 미국 상원의원과 49명의 하원의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는다면 미국 4대 대통령을 지낸 제임스 메디슨 (아래 초상화)이 있습니다.
제임스 메디슨이 위더스푼의 제자로 중요한 까닭은 그가 대통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미국 헌법을 직접 작성한 주 저자이며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기 때문입니다. 남부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메디슨은 남부에 위치한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북부의 비교적 신생 대학인 프린스턴에 입학하여 라틴어, 그리스어, 신학과 계몽주의 철학을 배웠습니다. 학부를 마치고 위더스푼 문하에서 히브리어와 정치철학을 연구하였는데 그에게 계몽주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위더스푼이 꿈꾸었던 공화제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메디슨 대통령은 미국의 첫 번째 국회의 리더로서 많은 법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미국의 첫 열 개의 수정헌법을 제안했기 때문에 권리장전 (Bill of Rights)의 아버지라고도 불립니다. 또한 정치 이론가로서 그는 새로운 공화국은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며 귀족 정치와 부패와 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믿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바로 위더스푼의 영향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메디슨 대통령은 미국에 공화주의를 정립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평생 헌신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프린스턴의 초기 역사와 프린스턴과 관련된 주요 건국 인사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https://youtu.be/4CYVRhcf600